지석영, 한글 사용을 청하는 상소를 하다(2)

기획/특집 /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 / 2019-10-16 07:26:03
영남알프스 역사문화기행

일찍이 한글에 관심을 가졌던 지석영

“우리나라 사람은 말을 하되 분명히 기록할 수 없고 국문이 있으되 전일하게 행하지 못하여 귀중한 줄을 모르니 가히 탄식하리로다. 귀중하게 여기지 아니함은 전일하게 행치 못함이요 전일하게 행치 못함은 어음(글자 소리, 語音)을 분명하게 기록하지 못한 연고이다”라고 1896년 <대조선독립협회회보> 1호에 ‘국문론’을 지석영은 발표했다. 지석영은 ‘국문론’에서 “우리 말과 글을 정확하게 통일해서 써야 한다”, “우리말을 글로 쓸 때는 말의 성조를 정확히 구분해서 써야 한다”고 했다. 


개화의 시대가 되자 ‘언문 불일치’의 문제가 제기됐다. 말은 우리말로 하면서 표기는 한자로 하는 기형적인 문자생활은 정보가 대량으로 생산되는 시대에 더욱 소리와 문자의 일치(언문일치)가 요청됐다. 지석영은 개화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어려운 한문이 아닌 알기 쉬운 한글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 의학자이자 한글학자인 지석영


1905년 광무황제에게 올린 상소에서, 한자 대신 국문(한글)을 널리 쓰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모와 쓰기에 대한 몇 가지 안을 제안했다. 지석영의 상소에 기초해서 1905년 7월 19일 광무황제는 ‘신정국문(新訂國文)’을 발표했다. 그러나 1905년 ‘신정국문’의 내용 중에 결점이 있음이 지적되면서 1906년(광무 10년) 5월 이능화(李能和, 1869~1943)가 ‘국문일정의견(國文一定意見)’을 제출하는 등 논란이 되자, 당시 학부대신 이재곤(李載崑)의 건의로 1907년(융희 1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에 통일된 문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국어 연구 기관으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가 설치됐다. 


국문연구소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정음청(正音廳)이 설치된 이후 한글을 연구하기 위한 최초의 국가기관이라 할 수 있다. 국문의 원리 및 연혁과 현재의 행용(行用) 및 장래 발전 등의 방법을 연구했다. 윤치오가 위원장이었고 이능화, 어윤적, 주시경, 군보상, 송기용, 지석영, 이민응, 이돈구가 위원이었다. 1909년 12월 연구 결과가 작성된 ‘국문연구의정안’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매우 훌륭한 문자 체계와 표기법의 통일안이라고 할 수 있다. ‘ㆍ’자를 그대로 쓰기로 한 것을 제외하면 이 의정안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 체계와 맞춤법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하지만 이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못했다.

한글로 출판한 개인 위생서와 오늘날에도 사용하는 자전을 만들다

지석영이 1891년 저술한 <신학신설(新學新說)>은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개인위생서로 주거위생에 관해 내용도 담고 있다. 주거관련 내용은 ‘광(빛)’, ‘공기’, ‘듸기(地氣)’ 항에서 등장하는데, 주거의 일조 및 채광, 통풍 및 환기, 주거지의 건조하고 신선한 공기와 토질 등이다. 


전통적인 ‘양생’ 개념에 의지해 서술됐지만, 빛, 공기, 물, 열 등 주거위생에 중요한 환경조건을 처음으로 제시하고 건조, 정결, 토질 등 주거지의 위생조건을 자세히 다뤘다. 이 책이 주목되는 것은 당대의 최첨단 의학 지식을 한자가 아닌 한글로만 기술했다는 점이다. 아직 한글 표기에 대한 통일안이 마련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 책은 189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된 근대적 주거담론의 기본적인 인식구조와 서술방식을 선취했으며, 근대적 주거의 필수조건으로 위생조건을 구체적으로 서술해 일반인들을 계몽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지석영의 <신학신설>


지석영은 한문을 강조하기보다 한글을 중시했다. 조선시대 지식의 전달 문자는 한자였다. 지석영은 1909년 <자전석요(字典釋要)>를 만들었다. 이 책은 1892년경 자전 집필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1904년 겨울 1차 완성했다. 이후 1년 이상 세심한 보완 과정을 거쳐 1906년 8월 최종 탈고했다. 긴 세월 동안 집필하는 과정에 한글의 표기법에 대한 연구도 자연히 돼 반영됐다. 


이 자전은 한자의 뜻과 발음을 한글로 처음으로 풀이한 책이다. 여러 의미로 쓰이는 한자의 뜻 가운데 널리 쓰이는 뜻을 먼저 배열했다. <자전석요>는 전통적인 자전의 틀에 따라서 편찬된 것이나 서체(書體), 규범음·현실음, 한문 자석(字釋) 및 이에 전면적으로 대응하고 다의성이 반영돼 있는 충실한 국문 뜻풀이, 그림을 제시한 것으로 형음의(形音義)에 관한 종합 정보를 제시한 자전이다. 이런 특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국문 뜻풀이다. 이 책은 1909년 7월 출판돼 초판 5000부를 반년 만에 팔았다. 그 뒤 1950년까지 스무 번을 거듭 펴냈다. 그 사이 두 차례에 걸쳐 단어를 추가하고 그림을 넣어 개정판을 내기도 했다. 지금도 이러한 형식의 자전이 출판되고 있다.
 

▲ 지석영의 <자전석요(字典釋要)>(1909)


국어사전 형식의 교과서를 만들고 외국어 학습서를 만들다

또 지석영은 국어사전 형식으로 된 우리나라 최초의 교과서인 <言文(언문)>을 1909년 출판했다. 이 책은 지석영이 저술하고 정기선이 교열한 일종의 한한자전(韓漢字典)으로 국한문혼용체로 돼있다. 사전형식으로 된 단어집 체재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사전으로서의 체재는 미비해, 한자의 독음(讀音)을 예시한 자음(字音) 색인의 구실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지석영은 실용 한자음에 대한 학습에 적합하도록 했으며, 국어화한 한자음 1만9000사어(詞語)를 싣고, 상편에서는 한자로 국문을 대조해 국어화한 까닭을 밝혔고, 하편에서는 한자의 자의(字義)를 국문으로 주석해, 국어만 알면 한자의 뜻을 자재로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1762~1836)이 천자문 등이 당시 조선 실정과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펴낸 한자 교재인 <아학편(兒學編)>을 만들었다. 한자 2000자를 수록한 정약용의 책을 바탕으로 1908년 3월 지석영은 영어, 중국어, 일어 발음까지 합쳐 새로운 지석영의 <아학편(兒學編)>을 펴냈다. 당시 중국어와 영어, 일어 등에 능통했던 전용규에게 주석을 붙이게 해 펴냈다. 영어 발음이 지금보다 더 정확하게 표기돼 있다. 예컨대, ‘R’ 발음은 ‘ㄹ’ 앞에 ‘으’를 붙이고 ‘L’ 발음은 ‘을’을 붙여 구별했다. ‘Rice’는 ‘으라이쓰’, ‘Learn’은 ‘을러언’으로 적었다. 최대한 영어 원음과 가깝게 나타내기 위해 지금 사용하지 않는 표기도 보인다. 한글이 어떤 소리라도 표현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되는 책이다. 지석영이 이런 어학책을 편찬한 것은 젊은 날 개화를 하기 위해 서양 서적 도입을 주장한 것과 같은 이유로 개화, 계몽된 조선의 사람을 육성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다. 일어, 중국어, 영어가 당시 가장 인기 있는 외국어였음을 반영한 책이다. 어학 능력이 격변기에는 권력과 출세의 수단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했다. 또한 어학은 정보수집의 원동력이다.
 

▲ 지석영의 <언문>(1909). 책의 본문은 가로쓰기로 돼있다.


한일병합 이후의 지석영의 삶

지석영은 일제 강점의 시기에 겉으로는 일제가 주관한 행사에 나가지는 않았다. 친일 부왜인의 삶을 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항일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의학자로, 한글학자로 그리고 대종교인으로 살았다.


1902년 2월 김가진과 함께 지석영 등은 국문학교(國文學校) 설립해 운영했다. 1911년 7월 문예구락부를 조직해 한문 교양, 문자 저술, 서적의 편찬 간행 등을 사업 목표로 했다. 1923년 5월 조선문통신강습학회(朝鮮文通信講習學會)에서 주최한 ‘조선문 선전강연’이 각황사에서 지석영의 사회로 성황리에 열렸다. 1926년 음력 9월 29일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제정 발표한 지 480년이 되는 날이라 하여 조선어연구회·신민사 주최로 훈민정음 반포 제8회갑 기념식을 식도원에서 거행하고, 이날을 ‘가갸날’로 제정하는 동시에 속칭 언문의 명칭 문제와 그 선전방책에 관한 문제를 논의했다. 1929년 10월 지석영은 유진태, 이승훈, 윤치호, 이종린, 남궁훈, 최린, 허헌, 송진우, 신석우, 안희재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 발기인으로 참석했다. 


지석영은 1914년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진료소를 차려 80년의 생 을 마감할 때까지 아이들의 건강을 돌봤다. 1915년 11월 조선의회(朝鮮醫會) 발기총회를 해 지석영을 회장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일제는 1916년 4월 전조선의생회(全朝鮮醫生會)를 보안법 위반으로 강제 해산했다. 1921년 3월에는 사립피병원창립기성회(私立避病院創立期成會)를 만들어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1926년 이후 동서의학연구회에서 활동했다. 1928년 12월 조선의 ‘제너’ 지석영에게 조선종두 오십년을 기념해 표창을 주었다.


또 지석영은 자선구호 사업을 했다. 1921년 4월 지석영 등 90여 명 유지의 발기로 금전을 수합해 경성 시내에 방 두 간, 부엌 한 간, 마루 한 간 가량씩의 작은 규모로 집을 많이 지어 빈민에게 나눠주는 사업을 했다. 5월 주택구제 발기인회를 지석영의 개회사로 개최했다. 1921년 12월 지석영의 우리 사회의 광영으로 생각한다는 의미의 간곡한 식사가 있었고, 다시 경성악대의 웅장한 군악소리에 102간의 신주택 상량식을 거행했다.


1921년 11월 3일 개천절 기념식을 대종교 남도본사에서 지석영의 사회로 열었다. 내회한 사람 일동이 “한배님나리심”이라는 개천가(開天歌)를 불렀다. 당대의 한글학자인 주시경을 비롯한 다수의 지식인 대부분이 대종교 소속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28년 1월 대종교 남도 본사를 계동에 설립하고, 1931년 11월 단군신전 봉찬회 창립총회에 참석했고, 1932년 6월 대성원(大聖院) 집회에 참석했다. 지석영은 지청천 장군을 대종교로 인도한 정신적 지주로 장군의 6촌 당숙이다.
 

▲ 지석영의 <아학편>(1908)


역사적 삶에 대하여

지석영은 1936년 2월 2일 여든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석영은 서양의 종두법을 도입해 천연두의 공포를 해방시킨 실천의학자일 뿐만 아니라, 근대 우리말의 규범화에 큰 족적을 남긴 국어학자로 기억해야 할 사람이다. 그는 격동의 시대에 살았다. 친일과 항일, 반일과 관계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 사람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평가는 그 뒤의 일이다.

 

▲ 종두 50주년 기념(동아일보, 1929. 9. 21.)


청춘의 시절에는 우두법의 습득과 보급에 전력하면서 그가 체험한 근대적 일본의 문물을 통해 개화의 길을 주장했다. 과학에 대한 신뢰로 미신타파를 주장하고 그 과정에서 무당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세계사적인 일본제국주의의 팽창정책을 인식하지는 못했다. 천연두의 치료에 매진하는 동시에 사회의 개화를 위해 민중의 계몽에 국문 보급이 시급함을 알고 국문 활성화에 노력했다. 그는 한글 보급의 선구자였다. 이러한 과정에 그의 삶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흘러가면서 적극적 혹은 수동적으로 행동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이후나 1919년 3.1운동 이후 그의 삶은 여전히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론과 대동회 등을 통한 민족정신을 강조하는 입장에 있었다. 적극적 친일은 아니었지만, 시류에 따라 일제의 한반도 강점정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이병길 시인, 역사문화질문자. 울산민예총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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