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산 681고지 산사람들…울산 야산대

기획/특집 / 배문석 / 2020-03-27 08:44:06
한국전쟁 발발 70년과 울산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올해는 10년 단위로 끊어 우리 근현대사에서 기억해왔던 주요 사건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4.19혁명 60주년, 전태일 분신 50주기, 광주민중항쟁 40주년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70년. 그 중 한국전쟁은 그 뒤에 벌어진 수 많은 사건들과 밀접한 인과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강점기가 끝나 해방을 맞이한 1945년부터 만 5년 동안 어떤 일들이 벌어졌으며, 한국전쟁 발발 초기 왜 수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 속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라는 지리적 위치와 다가올 미래를 포함해 시간적 위치를 찍는 좌표가 찍혀 있다.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진정 새롭게 출발하려면 직시해야 할 순간이다.
더구나 울산은 한국전쟁 발발 뒤 3개월 안에 최소 870명 이상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이는 국가기구에서 공식 조사해 발표한 결과지만 ‘언제, 왜, 어떻게’를 명확히 알고 있는 이들은 드물다. 게다가 학살이 빚어낸 상흔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시민사회 대부분이 그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1945년 해방 후 울산부터 1950년 한국전쟁 기간을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의 해법을 찾아가고자 한다.<편집자 주>


정치적 입장을 떠나 이른바 사회적 지위가 있었던 인물들이 월북을 택했다면, 남쪽에 남아 산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1946년 10월 민중항쟁 이후 미군정이 벌인 대대적인 체포 작전 때 도피한 이들을 ‘산사람’이라 불렀는데 산으로 올라간 사회주의계열은 인근 경찰지서를 공격해 탈취한 무기로 무장을 시작했다.


울산도 10월 민중항쟁 기간인 10월 11일 범서면에서 약 300명의 군중들이 경찰지서를 습격했고 10월 14일 서생면에서 500여 명의 군중이 면사무소를 공격했다. 경찰 진압 과정에서 주동자들을 비롯해 체포를 피해 인근 산으로 도피한 이들이 생겨났다. 


그렇게 ‘산사람’ ‘야산대’ 불린 이들은 초기에는 소극적인 도피와 자기 방어 형태의 무장을 했다. 그러나 1947년에 이르러 남로당 등 사회주의계열에 대한 미군정 경찰의 체포가 이어지면서 야산대는 경주와 무룡산 일대, 신불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알프스 일대, 온양 대운산 일대 등 울산 주변을 둘러싸고 넓게 퍼져 존재했다.

 

▲ 신불산 야산대 아지트(근거지)에 파여 있는 참호(왼쪽), 신불산 681고지에서 바라본 영남알프스(오른쪽)

 

1948년 남한 단독정부가 들어서면서 총선거를 거칠 때 상북면 신불산 681고지를 중심으로 야산대 전체 지도부를 이루게 된다. 두서면 백운산 감투봉을 중심으로 천마산, 아미산 등지에도 아지트가 만들어졌고, 언양면 대곡리 연화산 아지트, 온양면 대운산 아지트, 범서면 장족산 아지트, 두동면 치술령 아지트, 농소면 가대리 아지트, 강동면 동대산 아지트 등이 상호 연락을 취하며 존재했다.


대표적인 야산대 근거지인 파래소폭포 뒷산 681고지는 영남알프스 산악지대 전역이 연결되는 요지였다. 신불산 일대에는 1948년부터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될 때 ‘지하’로 못 들어가고 산으로 스며든 야산대가 30여명 가량 됐다고 한다. 당시 야산대에 들어갔다 한국전쟁 후 체포돼 장기수로 복역했던 구연철은 신불산 야산대가 1948년부터 남로당 경남도당 동부지구당 소속으로 편제됐다고 증언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동해남부지구당으로 바뀌었다가 전쟁 중 다시 남로당 제4지구당 제3지대로 편제가 바뀌었다고 한다.

 

결국 1946년 10월 항쟁 직후부터 1947년까지 계속 이어진 야산대의 증가는 초기 소극적 비합법투쟁에서 1948년 봄에 적극적인 무장투쟁으로 전환되면서 절정을 이뤘다. 이 기간은 야산대의 공격과 경찰의 반격, 토벌이 연이어 반복되던 때다. 

 

▲ 가지산 들머리, 석남사 옆에 서 있는 신불산공비토벌 작전기념비. 1949년부터 한국전쟁 후까지 야산대에 대한 토벌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1948년 8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앞서 5.1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시작한 ‘2.7 구국투쟁’이 벌어질 때 울산 인근 야산대의 공격이 집중됐다. 미군정은 이를 폭동으로 규정했던 데 남한 곳곳에서 대규모 파업과 봉기가 일어났다. 


5월로 예정된 제헌국회 단독선거와 분단정부 수립에 대해 남로당을 중심으로 전국적·조직적 저항을 한 것이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등 주요 도시 철도파업으로 열차 운행이 중단됐고, 부산에서는 항구가 봉쇄됐다. 거리시위가 이어졌고, 각급 학교도 동맹 휴학으로 동참했다. 도심에서는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한 김구 등 상당수 민족주의 진영도 가세했다. 


울산지역 야산대는 10월 여순사건이 벌어진 시기까지 산악지역 곳곳에 아지트를 만들고 지속적으로 마을로 내려와 공격을 감행했다. 


미군정 체계에서 1946년 서울시와 각 도별로 8개의 관구에 경찰청을 두고 그 밑에 시군 단위로 152개의 경찰서를 설치했는데 울산은 제7관구에 속했다. 단독정부 수립 후 경찰은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과 함께 사회주의계열에 대한 대규모 체포〮 작전을 시작하면서 야산대 토벌작전도 병행했다. 7관구 역시 신불산을 중심으로 울산을 둘러싼 산악지역의 야산대에 대해 적극 공세를 취했다. 


1949년 봄과 여름에는 경찰 뿐 아니라 민보단(民保團)이 가세해 관민합동작전을 펼쳐 아지트를 습격했다. 민보단은 기존 향보단(鄕保團)을 1948년 5.10 총선거 때 전환해 경찰 하부 또는 협조조직으로 구성한 것이다. 야산대가 다시 1949년 9월 총공세를 벌인 후에는 군대까지 투입되면서 군·경·민 합동작전으로 확대해 상당한 전과를 쌓았다.

 

▲ 1949년 3월 5일 <민주중보> ‘울산방면 무장폭도 추격 중’ 신문기사

 

이 시기부터 야산대는 고립돼 식량보급이 어려워졌을 뿐 아니라 연이은 군경의 급습으로 부대원 손실도 커졌다. 군경 토벌대는 야산대원을 사살한 후 시신을 훼손해 전시하는 방식으로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다. 민간인이 야산대를 지원하다 발각되거나 신고하지 않는 경우 체포하고 엄중히 처벌했다. 이런 상황의 전개는 아래 표의 1949년 군경의 무장출동 상황을 요약한 부분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1949년에 이르면 야산대가 경찰지서와 우익단체에 대한 공격을 가한 전과보다, 경찰과 군대가 진행한 보복 또는 소탕작전이 더 우세했다. 무엇보다 군경과 민간이 펼친 합동작전으로 야산대의 아킬레스건인 식량보급이 끊어졌고, 야산대에 협조했던 민간인에 대한 처벌도 훨씬 강화된 여파가 컸다. 결국 1949년 늦가을에 이르면 야산대 활동은 더 축소됐다. 물론 민간인들은 몇 년 동안 겪어온 양쪽의 공방 속에 피해가 누적됐다. 양쪽에서 희생된 민간인들은 감정의 골이 점점 커져만 갔다.

 

▲ 1949년 11월 6일 <조선민보> ‘신불산 폭도 군경합동 소탕작전 성과’ 보도기사


야산대가 마을로 내려와 경찰지서와 우익단체에 대한 공격을 가하면 이에 대해 경찰과 군대가 보복이나 소탕작전을 펼치는 방식이 지속됐다. 그 과정에 야산대의 아킬레스건이 되는 식량보급을 끊기 위해 합동토벌 이전부터 협조하는 민간인에 대한 처벌도 강화됐다. 민간인들은 양쪽의 공방 속에 피해가 커져갔으며 그 과정에 희생된 민간인 주변부터 감정의 골이 커져 갔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보도연맹은 북으로도 산으로 가지 않고 남아있던 이들을 국가 감시 체계 속으로 묶어낸 것이다.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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