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사회, 국제사회 보편 기준 지켜야

오피니언 / 박영철 울산인권운동연대 대표 / 2019-06-19 08:55:24
시론

ILO(국제노동기구) 100주년을 맞이하는 총회 연설에서 한국의 고용노동부 장관이 ILO 핵심협약 비준과 법 개정을 ‘동시 처리’하겠는 입장을 밝혔다. 다음날 문재인 대통령은 스웨덴 총리와 정상회담에서 "국제노동기구, ILO 핵심협약 비준은 나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고, 한국의 경제적인 패러다임 전환에 속한다"며 연내 비준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다.


한국이 ILO에 가입한 것은 1991년이다. 그러나 한국은 ILO에서 제시한 국제 노동기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회원국이면 당연히 의무로 가입해야 할 핵심협약 비준은 무시한 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예산분담금을 납부하며 오히려 이사회 의장까지 차지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작스레 핵심협약을 비준하고 관련법을 개정하겠다고 공언하고 나선 것이다. 물론 이마저도 자유한국당과 사용자단체들의 저항이 심각하게 우려되고 있지만 말이다.


아마도 지난 연말부터 보도되고 있는 유럽연합(EU)의 압박이 가장 큰 이유인 듯하다. 유럽연합이 한-EU 자유무역협정(FTA) 규정을 근거로 한국에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으며, 이행하지 않을 경우 한국을 전문가 패널에 회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실제 유럽연합은 한국의 핵심협약 비준 약속 미이행을 이유로 무역제재를 통한 압력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ILO 핵심협약은 4개 분야 8개 협약으로 이뤄져 있다. 모든 노동자가 반드시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권리에 관한 것으로 ‘조건을 제시하며 유보를 논의할 영역’이 될 수 없다. 이러한 연유로 ILO 회원국이라면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의무사항으로 지정된 것이고, 187개 회원국 중 141개국이 비준했듯이 경제적 상황 등을 이유로 비준을 늦추며 주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비준하지 않은 ILO 핵심협약은 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87호), 단결권 및 단체교섭 협약(98호), 강제노동 협약(29호), 강제노동 철폐 협약(105호)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4개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중국, 마샬제도, 팔라우, 통가, 투발루 등 이름도 생소한 6개국에 불과하다.


개발도상국을 자처하며 아직도 시기상조를 주장하고,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상황을 들먹이며 국제사회의 보편 기준을 무시하고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것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세계 경제 규모(GDP) 11위를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노동정책으로는 매우 저열해 보인다. 이제라도 한국의 노동자들이 보편적 노동권에서 더 이상 배제되지 않도록 아무런 조건 없이 ILO 핵심협약을 즉시 비준해야 한다.


선진국으로 진입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기준과 원칙이 통용되는 성숙한 사회로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사회의 보편 기준을 수용하고 준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인류가 존중해야 할 가치를 보호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사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ILO 핵심협약을 통해 노동에 대한 기본 기준과 원칙을 보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의 보편 기준 예컨대 인권과 관련한 국제인권규범은 인권문제의 원칙과 기준을 제공한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보편 기준은 최근 들어 심각해지는 혐오와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국제사회의 명확한 기준은 근거 없이 제기되는 일부 혐오세력들의 주장을 차단하고 인권을 옹호하기 위한 제도와 정책을 수립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현재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에서는 9개의 주요 인권조약을 마련하고 이를 발효한 상태다. ‘시민적?정치적 권리규약’,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규약’, ‘인종차별철폐협약’, ‘여성차별철폐협약’, ‘고문방지협약’, ‘아동권리협약’, ‘장애인권리협약’, ‘이주노동자권리협약’, ‘강제실종협약’ 등이다. 이중 우리나라는 ‘이주노동자권리협약’과 ‘강제실종협약’에 미가입돼 있다. 또한 우리나라가 가입한 7개의 주요 인권조약도 이행과 관련한 핵심 내용인 선택의정서 가입을 유보하고 있어 ILO 핵심협약 문제와 같은 부끄러운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우리가 국제사회의 보편 기준의 수용을 주저하는 한, 우리 사회를 극단의 대결로 몰아가고 있는 철 지난 진부한 논쟁과 말도 안 되는 억지 주장이 난무한 소모적 싸움에서 결단코 벗어날 수 없음을 확신한다. 국제사회는 이미 노동에 대한,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진일보한 기준을 제시하며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도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ILO 핵심협약을 넘어 미가입한 주요 인권조약과 선택의정서를 비준해 성숙한 사회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가길 간절히 기대한다.


박영철 울산인권운동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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