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동백에 관한 약사

기획/특집 / 정우규 (사)한국습지환경보전연합 이사장 겸 대표 / 2019-10-17 09:10:44
울산 동백 바로 알기

1. 머리말

이 글은 울산의 동백섬과 동백이 수록된 옛 지리지와 옛 지도, 각종 문헌에 수록된 조상들의 시문, 천연기념물의 지정과 보호 활동, 식물상과 식생 등의 연구에 관한 정보를 찾아서 모으고 정리한 약사다. 


울산의 동백섬과 동백 문화가 한국 및 세계의 동백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관계 기관에서 발행한 책자 및 연구자들의 논문에서조차 잘못 설명된 내용들이 있다. 잘못된 내용은 바로잡아야 하고 중요하고 자랑할 만한 내용이 있으면 찾고 정리해 동백 문화의 재창조와 관광 산업 등에 이용해야 한다. 신문 연재는 연재라는 사정상 필자가 일시에 다 쓸 수도 없고 독자가 볼 수도 없다. 그리고 독자들은 필요한 내용이 있으면 그때 읽으면 된다. 그래서 독자들이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앞으로 연재할 소주제들 속에 언급될 동백 관련 역사의 흐름을 간략하게 기술했다.

2. 울산의 동백 관련 사실의 약사

가. 중국 문헌에 수록된 신라의 동백, 해석류와 해류

중국 문화의 중심이 함양, 낙양, 서안 등 중원이었던 시대 중국인들은 현재의 중국 내에 동백이 자생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당나라 시대까지 중국에서는 동백이 해외(외국) 즉 신라에서 들어온 석류 닮은 식물이라 하여 해석류(海石榴)라 하거나 또는 해외에서 들어온 붉은 꽃이라 하여 해홍화(海紅花)로 불렀다. 현재 동백의 이름 산다(山茶)는 송대 이후에 주로 사용돼온 이름이다. 중국 문헌에 수록된 동백 기록은 3세기부터 나타나고 있다. 촉한(蜀漢; 221~263) 장익(張翊)의 저서 <화경(花經)>에 꽃들을 “구품구명(九品九命) 등급으로 구분하면 산다(山茶)를 칠품칠명(七品七命)에 나열할 수 있다”고 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북위(507~534)시대 간행된 <위왕화목지(魏王花木志)>에는 다음의 귀절이 수록돼 있다. “계림의 산다는 중원지구의 다화 즉 해석류를 이른다. 다화의 재배는 이미 남방에서 중원지구에까지 확대되었다[계주적산다급중원지구적다화석해류(桂州的山茶及中原地区的茶花海石榴). 다화적재배이유남방확전도중원지구(茶花的栽培已由南方扩展到中原地区)]”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은 원전의 기록이 아니라 후대의 저자가 고기에서 차용한 기록이라 과연 촉한 시대에 동백을 산다(山茶)라고 했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다. 


명확한 해석류 또는 해류의 기록은 남북조시대(557~589) 강총(姜總, 519~594)의 시 ‘산정춘일(山庭春日)’에 “언덕이 푸르니 물가의 왕버들이 핀 것이며 못이 붉으니 동백꽃[해류(海榴)]이 비친 것이네”가 최초의 기록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 기록은 중국 한시에 등장하는 최초의 동백 기록이기도 하다. 다음이 수 양제(568~618)가 태자 시절에 지은 시 ‘연동당(宴東堂)’이다. 이백(701~762)의 이태백 시집 주에 “해홍화는 신라국에 나고 색깔이 매우 선명하고 아름답다[해홍화출신라국심선(海紅花出新羅國甚鮮)]”고 기록돼 있다. 동백 즉 해류(海榴) 또는 해석류(海石榴)는 그 종자가 동해 신라에서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인래자해외(因来自海外), 고명(故名); 지유설기종유동해신라국(也有说其种由東海新羅国)] “해석류는 신라국에서 들어 왔다.[해석류신라국래(海石榴新羅國來)]” <태평광기(太平广记)>에 이태백의 시를 주석하면서 이런 글이 나온다. “신라국에는 해홍과 해석류가 많다.[신라다해홍병해석류(新罗多海红并海石榴)]” 그리고 이태백의 시 ‘영린여동창해석류(咏邻女东窗海石榴)’에도 “동백이 대단히 희소하다[해류세소희(海榴世所稀)]”는 구절도 있다. 또 <유서찬요(類書纂要)>에 “해홍이 신라국에서 들어왔다[해홍래신라국(海紅來新羅國)]”라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중국 중원의 동백과 그 문화가 우리 신라에서 간 것이고 그 현장이 울산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나. 한국 및 울산 관련 문헌에 수록된 주요 동백

1) 한국과 일본의 주요 문헌에 수록된 동백

한국에는 동백나무가 남해와 서해의 도서지방과 해안에 국지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각 시대 문화의 중심이었고 문화인들이 많이 살았던 부여, 경주, 개성, 서울의 사람들은 동백 자생지와 동백꽃을 접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인지 관련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상원경이(上原敬二, 1959)의 <수목대도설>에 3000년 전 기자 시대에 지리산 산록에 동백나무를 심었다는 언급이 있다. 이 기록이 최고의 기록이나 원전을 밝히지 않아 그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삼국시대 신라가 중국에 수출한 품목에 당시 동백의 한·중·일 공통 이름인 해석류(海石榴)가 들어 있다. <삼국유사> ‘낭지승운보현수조’에 혁목(赫木)이란 꽃 이름과 이 꽃이 있어 이름을 붙인 혁목암과 혁목사가 나온다. 어느 저자도 이 이름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연구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필자는 이 혁목이 색깔이 붉고, 중국에서는 있는지 몰랐고 인도와 신라에 있는 식물이란 점,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개체가 있고 조매화로서 특이하거나 특별한 생태를 가진 점, 불교 문화와 관련성 등에서 동백으로 추정한다. 역사적 시기는 신라 법흥왕 때이니 520년대이다. 혁목을 동백으로 본다면 한국 동백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된다. 


일본 최초의 역사서는 <고사기(古事記)>이고 이 책에 일본 최초의 동백 이름 도바키(都婆岐)가 수록돼 있다. 울산에는 도박골, 돈박골, 돈박골 사거리, 돔배기 서미 등의 이름과 동박새라는 새 이름이 남아 있다. 이들 이름은 필자가 주장하는 고대 한국의 동백 이름 도바기와 같은 계열의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그들의 동백기름 착유기술이 삼한시대 한반도 남부에 발달했던 동백나무의 이용법과 착유기술에서 들어왔다고 추정한다. <발해고>에 대진국이 일본에서 동백기름을 수입한 사실이 남아 있다. 


고대 한국의 동백은 약용으로, 머릿기름으로서 중국에까지 수출됐고 신라에서 중국에 보내준 동백은 당송시대 많은 시가와 그림에 등장하는 꽃이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동백이라는 현재의 이름이 나타나는 최초의 기록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수록돼 있는 그의 시 ‘동백화(冬栢花)’다. <고려사>에 고려 말 충숙왕 때 채홍철이 불렀다는 ‘동백목곡’이란 시가의 이름이 남아 있다. 조선 전기에 들어오면 하연의 시 ‘촉석루’와 성삼문의 ‘반개다화’가 있다.
 

▲ 울주 목도 상록수림은 천연기념물 제65호로 공개 제한구역으로 돼 있어 문화재청에 허가를 받은 사람만 출입이 허용된다. 1962년 12월 7일 지정됐다. ⓒ이동고 기자


2) 울산의 동백 관련 기록

울산의 동백나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중종 26년, 1530년에 이행(李荇) 등이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태종 1년(1401) 권근의 대화루(지금의 태화루) 중수기 기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2권에 “울산 고을... 이름 있는 꽃과 이상한 풀, 해죽(海竹)과 산다(山茶)가 겨울에도 무성하여 이를 장춘오(藏春塢)라고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의 산다는 동백나무를 나타내는 중국 이름으로 이 기록을 볼 때 610년 전에는 이휴정 위쪽 태화강 쪽 절벽에 동백나무가 자라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충혜왕 때 정포의 시 ‘개운포’ 1연에 ‘영도운공난(暎島雲光煖)’이란 귀절이 나오는데 이 귀절의 영도(暎島)를 송수환(1999)의 ‘태화강에 배 띄우고’(울산명승 한시선집)에서 같이 동백섬으로 해석할 경우 권근의 대화루 증수기 기문보다 앞선다. 그러나 온산읍지발간추진위원회의 <온산읍지>(2002)에서는 이와 달리 번역하고 있어 영도(煐島)가 동백섬을 뜻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3) 동백섬(冬柏島)이 수록된 옛 지리지와 지도

동백섬 이름이 수록된 최초의 지리지는 단종 2년(1454)에 간행된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다. 이 지리지의 울산조에 “동백도가 군의 남쪽에 있다[동백도재군남(冬柏島在郡南)]”고 수록돼 있다. 그리고 양성지(梁誠之, 1481)의 <동국여지승람>과 이행 등(1531)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동백섬(冬柏島)이 군[병영성(兵營城)] 남쪽 30리에 있고 동백나무가 섬에 가득해 이렇게 부른다[동백도재군남삼십리동백만도고명(冬柏島在郡南三十里冬柏滿島故名)]고 수록돼 있다. 이후에 간행된 <학성지>(권상일, 1749), <대동지지>(김정호, 1864), <경상도읍지울산부여지도서신편읍지>(1786), <경상도읍지울산부읍지>(1831), <영남읍지울산부사례>(1894), <교남지>(정원호, 1934), <조선환여승람>(이병연, 1938) 등의 지리지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내용을 거의 답습하고 있다.


울산의 동백섬이 표기된 최초의 지도는 <팔도총도(八道總圖)>다. 이 지도에는 동백도와 처용도(처용암)가 연결된 섬으로 그려져 있다. 이후 동백섬은 18세기 중엽에 그린 김정호의 <해동도(海東圖)> 경상도편, 18세기 후반 <조선팔도지도> 경상도편과 <동국팔로분지도> 경상도편 등이다. 1832년 <경상도읍지> 울산지도 등에 겨울 동자 동백(冬柏) 또는 오동나무 동자 동백(桐柏)으로 표기돼 있다. 김정호의 1834년 <청구도(靑邱島)>와 <청구경위도(靑邱經緯圖)>, 1861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은 축척을 사용했고 죽도, 동백도, 명선도 등이 표기돼 있으나 이들의 위치나 순서가 다르다. 1918년 조선총독부가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近世韓國五萬分之一地形圖)>를 간행하면서 온산읍 방도리 동백섬을 장생포 대섬 즉 죽도로 잘못 표기했다. 


동백섬의 동도이명 목도는 1937년 조선총독부가 동백섬 상록수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때 목도마을의 상록수림이라 하여 목도상록수림(目島常綠樹林)으로 지정한 것이 오류를 낳게 했다. 목도란 이름은 2005년 울산지명위원회에서 동백섬을 목도로 의결해 중앙 지명위원회의에 심의를 의뢰했고 2006년에 동백섬의 이름이 목도로 바뀌었다.

4) 동백섬과 동백나무 관련 한시문

<조선태종실록>에는 동백섬 기생 익사 사건이 수록돼 있다. 이 사건은 <태종실록> 제21권에 나온다. 태종 11년(1411) 신묘년 6월 9일에 “지울주사 이복례를 선주로 귀양보냈다”란 조항에 실려 있다. 조선시대 김종직은 동백섬을 구경하고 ‘동백섬[동백도(冬柏島)]’이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에 동백섬 기생 익사 사건 때 익사한 기생을 애도하는 “울산에서 두고두고 한이 되는 것은 미인들이 함께 몽땅 빠져 죽은 일이라네[학성천재한(鶴城千載恨) 표진남위군(漂盡南威群)]”이라는 구절이 있다. 남용익이 쓴 “울산에서 김수익의 적소를 찾다[과학성금제주(過鶴城金濟州) 수익(壽翼) 적소(謫所)]”라는 시가 전하고 있다.

5) 천연기념물 지정 및 보존

조선총독부가 울주군 온산읍 방도리 목도마을의 상록수림을 천연기념물 제65호 목도상록수림으로 지정한 것은 1937년 6월 11일이다. 조선총독부는 1937년 6월 9일에 제3회 조선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회의를 열었고 이 회의 결정에 의해 목도상록수림을 천연기념물 제65호로 지정했다. 조선총독부가 목도 상록수림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이유는 이 숲이 동해안에서는 가장 북쪽에 있는 상록활엽수림이었기 때문에 식물분포지리학과 식물기후학상으로 중요한 연구 자료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천연기념물의 이름이 목도상록수림인 것은 조선총독부가 동백섬을 포함한 목도마을의 상록수림을 천연기념물 제65호 목도의 상록수림(目島の常綠樹林)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현재 목도상록수림은 일본의 식민지 조선총독부의 천연기념물이 아니라 1962년에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섬의 이름을 원래의 이름 동백섬으로 바꾸고 천연기념물의 이름도 울주군 동백섬상록수림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해방 이후 천연기념물 관리부서는 1961년부터 1999년 문화재청이 문화체육부의 외청으로 승격하기 전까지 문교부 문화재관리국이었다. 1999년 문화재청이 개청된 이후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방의 천연기념물은 각 기초지자체 문화관광과에서 위임 관리하고 있다. 


그동안의 주요 연구 및 보존 사업은 1993년 천연기념물 수림지 생태계 조사, 1999년 목도 상록수림 관리 계획 수립, 2011년 울산지역 동백나무 서식 실태 조사 등이 있었다. 


정우규 (사)한국습지환경보전연합 이사장 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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