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병대의 해산

기획/특집 / 배성동 시민/소설가 / 2021-05-04 00:00:13
연재

조선범 망명보고서(3)

▲ 1896년 진도 대호에 색채를 입혔다. ©문정훈 화가


조선 무관의 속울음

활란(活亂)의 시대다. 서슬 퍼런 조선통감부의 무단통치에 겁박을 받아온 조선 마지막 황제의 칙령으로 조선병대의 해산이 반포됐다. 1907년 7월 31일이었다. 이튿날부터 한성을 시작으로 전국의 조선병대 지방병참소에서 부대 해산식이 열렸다. 회령(會寧)·종성(鐘城)·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에서 모여든 함북육진 진위대 소속의 무관 장교들은 원산에 주둔한 왜제 경비대대에 소집돼 조촐한 해산식을 했다. 권취문은 뙤약볕 아래에서 순종 황제의 명의로 된 조선병대 해산조칙서 낭독을 들어야 했다.


‘짐이 생각건대 국사 다난한 때를 당하여 극히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지업에 응용함이 금일의 급무라. 현재 군대는 용병으로 구성한 까닭으로 상하가 일치하여 국가를 완전히 방위하기에 충분치 아니할새, 짐은 지금부터 군대 쇄신을 꾀하여 사관 양성에 전력하고, 나중에 징병법을 발포하여 공고한 병력을 구비코자 하므로 짐이 이에 유사에 명하여 황실 시위에 필요한 자를 선택하고, 기타는 일시 해대케 하노라…….’ 


낭독되는 조칙을 듣고 있던 권취문은 터져 나오는 속울음을 감추느라 몇 차례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땅을 강점하고 우리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안겨준 불구대천의 원수 놈이 이 나라의 군대를 해산하다니……. 치가 떨렸다. 


‘황제는 이 나라의 주인이며, 하늘의 아들이고, 만백성의 아버지다. 아무리 허수아비 황제이기로, 국가의 절대 수호자요 기둥인 군대를 주먹 한 방 날려보지도 못하고 해산한단 말인가…….’
권취문은 창 짧은 군모로 얼굴을 내리깔긴 했으나 떨리는 전율을 버티긴 쉽지 않았다. ‘버터라! 버터라!’ 불끈 쥔 두 주먹엔 땀이 맺었다.

권취문(權就文). 방년 37세로, 조선 마지막 시험인 식년문무과전시(式年文武科殿試) 무과에 급제했다. 병마만호의 휘하 변경지역의 남방 정교(正校)로 복무하다가 일제에 의해 조선병대가 해산되면서 해산 군인이 되었다. 왜제의 총칼 앞에 조정은 무력했다.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더니 급기야 고종 황제의 퇴위에 이어 군대를 해산했다. 이젠 망조 든 나라를 바로 세우기란 중과부적이다. 조선을 수중에 넣은 일본제국은 날강도 속셈을 드러냈다. 철도부설이며 광물 수탈, 산림 약탈을 확장하고 그것도 모자라 올가미를 씌워 노복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직 예속과 복종만 요구했고, 강권에 항거하는 조선인들을 폭도라는 이름으로 공개처형하고 무차별로 학살하는 포악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굴종의 명령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았다. 굴종도 이런 굴종 없고,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다. 닥쳐올 종살이는 불을 보듯 했다. 비분강개한 우국지사들은 식민통치 망국노로 살기보단 죽음을 택했다. 허나, 권취문은 무관답게 살아서 무장 항거하기로 했다. 


‘조선의 병영이여, 조선은 이제 우리 손에 달렸다. 대륙침략의 야욕에 사로잡힌 일본제국에 한 방 먹이자. 조선은 어제도 오늘도 앞으로도 영원히 조선 민족의 땅으로 남아 있을 것이니. 남의 땅을 넘보는 책동이 자살행위라는 것을 똑바로 보여주자.’ 하지만 주먹질은 허공을 맴돌았다.

식민지 백성은 상갓집 개보다 못하다

해산식을 마친 권취문은 정문을 나왔다. 착검한 왜병 초병이 병영을 나서는 해산 군인들을 지켜보았다. 이제는 민간인 신분이 된 그들의 어깨는 풀 죽은 자루였다. 권취문이 병영을 빠져나오자 나무 아래 모인 해산 군인들이 작별을 나누고 있었다. 이로써 해산 군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왜제 제국군의 정규훈련을 받지 않은 조선 군인들은 낙향 길을 택해야 했다. 왜제군 측에서 해산 군인들에게 제안했던 원산항 부두 노동자 일자리는 공염불에 그쳤다. 처음 왜제 병군들이 원산에 주둔하기 시작할 때 주민들은 점령군에게 당할 여자들을 걱정했다. 일진회들은 낯선 서양인보다 우리와 얼굴이 비슷한 일본인을 받들어야 한다고 선동했고, 왜제가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뒤론 완전히 정세는 굳어버렸다.


권취문은 원산 시가지를 천천히 걸었다. 국방상, 상업상 중요한 거점인 원산은 하루가 다르게 작은 일본으로 변하는 중이다. 왜인들은 경찰서, 우편국, 도립병원, 금융조합, 영림지청 등 모든 관공서를 장악했다. 거기다 목 좋고 전망 좋은 상권은 이미 그들이 차지했다. 원산에서 북청 이북 동해안은 그야말로 물 반 고기 반이다. 대구나 명태 같은 어종이 풍부하고, 말린 명태는 인기 식품이다. 


왜제군 원산 경비대대가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04년이었다. 서해안의 제물포, 남해안 부산과 함께 개방된 원산항은 해안이 육지 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는 완벽한 정박항이다. 왜제는 자국과 마주 보고 있는 원산항을 노렸다. 1880년 왜인에게 먼저 개방됐고, 이어서 1883년에는 모든 외국인에게 개방됐다. 개항 초기에는 왜인 숫자가 88명, 대청제국인이 80명, 그 다음이 러시아 순이었다. 조선에서는 서양국 러시아를 로서아(露西亞), 노국(露國), 아라사(俄羅斯)로 불렀다. 이웃 나라들은 조선의 단물을 빨아내기에 혈안이었다. 조선의 개항장 관세 징수 업무는 대청제국 관리들이 맡았고, 우편이나 은행, 군사 동향 등 중요한 권리망은 왜제가 통제했다. 거기다 러시아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조선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둔 러시아는 부동항 원산항에 관심이 많았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개설한 러시아는 태평양권 진출을 위해서 원산을 기착지로 삼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을 손아귀에 넣은 왜제는 함경도 원산항까지 러시아가 영토 확장을 꾀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왜인과 청국인 사이에 약간의 건축 부지를 조선 정부로부터 원산에 약정받았다. 왜제와 대청제국은 조선이 러시아의 수중에 떨어질 경우 자국의 주요 교역로를 빼앗길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이 러시아에 병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합할 필요가 있었다. 아, 이 얼마나 불행한 나라인가. 명목상 독립국이지만 조선은 오랫동안 대청제국에 정복당해왔고, 호시탐탐 조선을 노렸던 섬나라 왜제국은 강탈국이 되었으며, 대국 러시아는 자국의 이익만 꾀하려 했다. 1905년 러일전쟁으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러시아 함대가 침몰하는 사이에 조선 영토 깊숙이 침투해 이미 압록강 두만강 국경까지 장악해 있었다. 대한제국은 참으로 무력했다. 왜제에게 순순히 병영을 내어주고 급기야 군대까지 해산되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은 군대가 없는 국가였다. 조선 왕은 군대를 원하지도 않았고, 근대적인 군대를 유지할 재원도 없었다. 조선에는 그렇다 할 함대나 전투선조차 없었다. 고작 물품을 운반하는 수송선 몇 척뿐이었다. 바다를 지킬만한 해군이 없기 때문에 대청제국과 왜제에게 무방비 상태로 항구를 내어 주었다. 군대라고는 오직 황제를 지키는 서울수비대와 평양진위대 뿐이었다. 서울수비대 3개 사단 병력 약 5000명, 평양 병력 1500명은 검이나 조총을 다루는 훈련을 했다. 황제가 있는 서울에만 근대적 군사 훈련이 이뤄지고 지방에서는 활쏘기 같은 재래식 훈련이었다. 그런 면에서는 차라리 거친 산악에 단련된 산포수들이 훨씬 훈련이 잘 되었다. 산포수들은 범이 나타나면 앞장서 토벌에 나섰고, 전투가 벌어지면 용감무쌍하게 맞섰다. 권취문이 북청 홍범도 같은 산포수들을 신뢰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였다.


권취문은 북청 가는 선박 운항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원산 세관으로 갔다. 세관 역시 왜색이긴 마찬가지였다. 권취문은 원산(元山) 세관의 명문 표기가 왜식 지명 ‘겐산’으로 변경된 것을 알게 됐다. 대청제국 지도에는 ‘위엔산’, 러시아 지도에는 원산과 본산의 중간 발음인 ‘원싼(Boнcaн)’으로 표기됐다. 또 침략자 왜제는 서울역을 ‘게이죠(경성)’로, 인천을 ‘진센’으로 자기네 식으로 발음해 영문 표기를 했다. 권취문은 군 장교들로부터 날카로운 지성이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기민한 인지 능력으로 외국어를 빨리 습득했고, 나아가 대청인이나 왜인보다 훨씬 좋은 억양으로 유창하게 표현했다. 두만강을 사이에 둔 함북육진 국경수비대에 순환 복무할 당시에는 대청제국과 러시아제국 간에 직간접으로 교류했다. 두 나라 군관들과의 교류는 그의 견문을 넓게 했다. 대청제국, 러시아제국 군사 교류와 민간지원 업무를 맡게 되면서 두 나라 외국어를 섭력할 수 있었고, 청일전쟁 이후에 진주한 왜제 연합군에 조선병대가 귀속되면서 일본어를 익혔다. 국경을 넘으면 힘이 났다. 다른 나라에 비해 조선인은 체격도 좋고 총명함을 타고 난 편이다. 1894년 조선을 방문했던 이사벨라는 조선인은 청나라인과도 일본인과도 닮지 않았고, 그 두 민족보다 체격이 좋고 외모가 준수하며 똑똑하다고 했다.
 

 

▲ 진도 포수와 호랑이를 쫓는 작가는 하나다.

 


북방을 떠도는 영혼이여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나는 원산항이 나왔다. 바다를 보자 남도 땅에서 올라오고 있을 반구대포수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호랑이도 두려워하지 않는 일당백 사냥꾼이다. 권취문이 태어난 울주 고을은 호사가 많았다. 그의 안태 고향인 언양 비알에는 영호지총(靈虎之塚)이라는 호랑이 무덤이 있는데, 고을을 지키는 수호범 같은 존재였다. 언양 고을을 감싼 천화현(穿火峴)은 빛을 받아들이는 산이다. 고을 사람들은 범이 설치는 천화현 출입을 꺼렸다. 권취문은 몰이꾼을 동원해 범 사냥에 나서곤 했다. 범 사냥은 삼총사가 앞장섰다. 죽마고우인 반구대 도포수, 언양 선달 장도영 그리고 권취문 자신이었는데, 아르렁거리는 범을 마주친 순간 상투가 뒤틀렸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소장수들이 소를 몰고 넘던 사자평, 등짐 진 소금쟁이이 드나들던 석남재, 운문산 배너미도 뒤가 켕기는 골짝이다. 이보다 더 켕기는 데는 언양 비알에 있는 반구천이었다. 신라 왕족들이 드나들었던 반구천 돌방구에는 만 개의 공룡발자국과 함께 범이 무더기로 그려졌는데, 이게 예사롭지 않았다. 


권취문이가 범을 처음 포획한 것은 조선병대 남방 정교(正校)로 복무하던 함경도 회령 보을하진이었다. 하루는 병졸들과 변경을 순찰하던 중에 무람으로 출몰하는 산중 대호를 만났다. 비호처럼 달려드는 대호에게 말 한 필이 희생되고, 병졸 한 명이 팔에 부상을 당했다. 그때 토착포수가 아니었다면 더 큰 희생이 따를 뻔했다. 말의 목을 문 범이 눈에 불을 흘리며 쏘아보았다. ‘가까이 오면 너희들 목도 아작 내겠다.’ 그때 나타난 두 산포수는 말의 목을 물고 있는 대호를 향해 ‘불 받아라!’ 고래고함을 치며 화승총을 연달아 쏘았다. 백두산을 출입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홍범도, 차도선이었다. 


배성동 시민기자, 소설가

※ 이 글과 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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