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나라의 어린이날

오피니언 /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 2021-05-04 00:00:46
기억과 기록

1931년 5월 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울산 어린이날 광경(위는 기행렬 아래는 근우회원 복떡 만드는 것)’이라는 제목의 사진이다.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에서는 울산의 어린이날 풍경을 자세히 전하고 있다. “울산에서는 어린이날을 기념하기 위해 전부터 분주하게 준비하여 지난 3일 오전 9시 울산청년동맹회관 운동장에서 주최 측 근우지회 대표자 김지순 씨의 사회로 간단한 식을 마치고 곧 깃발을 들고 행렬을 시작했다. 모여온 어린이는 울산읍에서 약 600명, 병영에서 약 400명에 달하고, 노래와 만세를 외치며 시내를 일주하는 광경은 일대 장관으로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학성공원에서는 복떡을 나누어 주고, 복등으로 장식한 회관에서 음악연주회를 열었는데 이 또한 장외까지 넘치는 만원으로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사진 속에 깃발을 들고 행진하고 있는 어린이의 발걸음이 경쾌하게 느껴진다. 콧노래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기행렬에 참여했던 어린이가 일기를 썼다면 “내가 대장이 된 것 같았다”, “내가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라고 적지 않았을까. 두 번째 사진 속에서는 시끌벅적 웃음소리가 들린다. 복떡을 만들다가 사진을 찍는다는 소리에 사진기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근우회원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떡을 한가득 만들며 들떠 있었을 것이다. 근우회 회원이었던 여성들이 지역의 큰 행사를 주최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전까지 어린이날 행사는 남성 중심의 사회단체들이 주최했고, 여성들은 늘 행사장 밖에서 구경하거나, 뒤에서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1920년대 여러 여성단체가 생겨나며 여성들의 사회운동이 점차 활발해졌고, 1920년 후반에는 전국적 여성단체인 근우회가 조직되며 여성운동은 보다 조직력을 갖추게 됐다. 사진 속 여성들에게도 이날은 당당한 지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는 뿌듯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매일이 잿빛이었을 것 같은 일제강점기. 빼앗긴 나라에도 어린이날이 왔다. 하지만 이날의 색깔만큼은 5월의 나무들처럼 막 피어나는 연둣빛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깃발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시내를 행진하는 어린이들의 행렬, 어린이들의 행진을 응원하며 박수를 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작은 희망의 씨앗이 싹텄을 것이다. ‘저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든 2021년에도 어린이날이 다가왔다. 사회가 힘들어질수록 학대와 방임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와서 모두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어린이날만큼은 바이러스가 주인공이 아닌 어린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복떡을 나누고 복등을 달았던 1931년의 울산사람들처럼 우리 모두 주변의 어린이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날이 됐으면 한다. 마스크 없이 아이들의 밝은 웃음을 볼 수 있는 날이 곧 오기를, 복등을 켜는 마음으로 소망해본다. 


백승아 기억과기록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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