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를 후계자로 확정하다

기획/특집 /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2019-10-03 09:34:19
해월 최시형 평전

땅 아끼기를 어머니 살과 같이 하라

해월은 여주 전거론으로 오기 직전인 8월 추석에 자신이 후계자로 삼아 집단지도체제를 이끌었던 김연국, 손천민, 손병희 3명을 불러 “내가 일전에 너희들 세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천하가 다 달려들어 흔들더라도 어찌할 수 없으리라고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너희들 운수가 각각 다르니 애석한 일이로다. 앞으로 곧 급한 일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너희들 세 사람이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지 못하리라. 그러니 손천민은 당동(堂洞,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으로, 김연국은 보평(湺坪, 충북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 보뜰)으로, 손병희는 수곡(水谷,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 앵산동)으로 각각 헤어지라”고 말했다. 


해월이 이렇게 세 사람을 각기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은 우선 동학 교단의 안위를 위해서였다. 해월과 3인이 한 곳에서 동학 교단을 이끌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만일 관군에 의해 한꺼번에 체포되면 교단 지도부가 하루아침에 와해할 수 있었다. 해월은 이러한 사태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3명의 후계자를 각각 다른 곳으로 보냈다. 다음으로는 집단지도체제를 정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위의 해월의 말 가운데 3인이 ‘각각 운수가 달라 끝까지 같이 갈 수 없다’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해월은 집단지도체제를 정리하고 단일체제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해월은 3인을 멀리 보낸 후 원로들의 의견을 들어 후계자를 선정하려고 했다. 또 동학혁명 이후 충청도와 경기도 지방에 되살아나는 동학 세력을 규합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해월은 여주 전거론으로 옮긴 후에도 병세가 나아지지 않았다. 앵산동에서 발병한 이질은 전거론에서도 그를 괴롭혔다. 그래서 해월은 집에 누워 지낼 때가 많았다. 하루는 해월의 자식들과 동내 아이들이 나막신을 신고 마당에서 뛰어 노는 소리를 듣고 누었다가 벌떡 일어나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우주는 한 기운이라, 나막신 끄는 소리가 내 가슴에 울려 아프게 하였도다. 이것은 기운을 난동시키면 한울님이 싫어하는 연고(緣故)이니라”라고 말했다. 해월은 평소 “땅 아끼기를 어머니 살과 같이 소중히 여겨라”라고 말했는데 아이들이 나막신을 신고 쿵쾅거리는 소리가 해월에게는 어머니의 가슴을 때리는 소리로 들린 것이다. 당시의 해월은 자연과 하나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 전거론(이천시 강천면 도전2리) 마을 안내도. <신인간>(통권 360호, 1978, 8・9합병호)에 실린 지도로 이곳을 답사한 표영삼이 그렸다. 지도의 가운데에 위치한 전거론은 문막에서 여주로 가는 42번 국도에서 반계교차로에서 여주 방향 원문로를 타고 반계리의 동수교 못 미쳐 우회전해 349번 국도를 타고 반계저수지를 지나 북서쪽으로 7km 거리를 가면 도전2리가 나타난다.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삼경(三敬)

3인이 전거론을 떠나자 해월 주변에는 여주접주 임순호 등 몇몇만이 남았다. 10월 들어 해월은 임순호를 포함한 여주의 도인들을 모아놓고 삼경(三敬)에 관해 설법했다. 삼경은 해월 말년의 법설로 해월의 수행 목적과 해월이 꿈꾸는 세상이 어떠한지가 고스란히 녹아있어 전문을 싣는다.

사람은 첫째로 경천(敬天)을 하지 아니하지 못할지니, 이것이 선사(先師)의 창명(創明)하신 도법(道法)이라. 경천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眞理)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왜 그러냐 하면 한울은 진리의 충(衷)을 잡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천은 결단코 허공을 향하여 한울님을 공경한다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을 공경함이 곧 경천의 도를 바르게 아는 길이니, ‘내 마음을 공경치 않는 것이 곧 천지를 공경치 않는 것이라’함은 이를 이름이었다. 사람은 경천함으로써 자기의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될 것이요, 경천함으로써 다른 사람도 나의 동포요, 물건도 나의 동포라는[人吾同胞 物吾同胞] 완전한 이치를 깨달을 것이요, 경천함으로써 남을 위하여 희생하는 마음, 세상을 위하여 의무를 다할 마음이 생길 수 있나니, 그러므로 경천은 모든 진리의 중추를 움켜잡는 것이니라. 


둘째는 경인(敬人)이니 경천은 경인의 행위에 의지하여 사실로 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경천만 있고 경인이 없으면 이는 농사의 이치는 알되 실지로 종자를 땅에 뿌리지 않는 행위와 같으니, 도 닦는 자는 사람을 섬기되 한울님과 같이 한 뒤에야 처음으로 바르게 도를 실행하는 것이니라. 도가(道家)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고 이르지 말고 한울님이 강림하였다 이르라 하였으니, 사람을 공경치 아니하고 귀신을 공경하여 무슨 실효가 있겠느냐? 어리석은 풍속에 귀신을 공경할 줄은 알되 사람은 천대하나니, 이것은 죽은 부모의 혼은 공경하되 산 부모는 천대함과 같으니라. 한울이 사람을 떠나 따로 있지 않은지라 사람을 버리고 한울을 공경한다는 것은 물을 버리고 갈증을 벗어나려는 것과 같으니라.
셋째는 경물(敬物)이니 사람은 사람을 공경함으로써 도덕의 극치가 되지 못하고, 나아가 물건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천지기화(天地氣化)의 덕에 합일(合一)될 수 있느니라.


해월의 삼경 사상은 동학의 생명관을 잘 담고 있는 법설이다. 한울을 모신 상대에 대한 섬김을 통해 만유의 공생과 순환, 나아가 상생과 조화의 삶을 이루려는 동학이 지향하는 우주적 삶의 모습을 삼경 사상은 잘 표현하고 있다. 영산대학교 송봉구 교수는 “해월의 삼경 사상이 성립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내 안에 한울님을 모셨고 그것을 길러서 밖으로 드러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을 한울로 하고, 다른 동식물을 한울로 하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라고 하여 삼경 사상은 해월이 오랜 수행의 결과로 도출한 한울과 인간, 자연의 관계를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실을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고 했다.
 

▲ 여주 전거론의 해월 은신처. 임순호가 말년을 보내기 위해 지었던 이 집을 손병희가 찾아가 부탁해 해월을 은신시켰다. 임순호의 집은 여주시 강천면 도전2리 571번지 일대다.












의암 손병희에 도통(道統)을 전수


동학혁명 이후 지속하는 지목 속에서도 동학 교단은 점차 안정돼갔다. 특히 1897년 여름이 되자 전국에서 조직 재건이 시작됐다. 여기에는 앞에서 말했듯이 김연국, 손천민, 손병희 세 사람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흩어진 도인들을 모아 조직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당시 해월은 병중이라서 다닐 수 없었지만 십수 년을 해월의 지도로 성장한 3인은 해월이 했던 그대로 각지를 다니면서 도인 수습과 포덕을 일으켰다. 


해월이 12월 24일 다시 김연국, 손천민, 손병희 3인을 전거론으로 불렀다. 해월은 3인을 앞에 두고 “너희들 세 사람 가운데 주장이 없으면 안 될 것이니 손병희로 주장으로 삼노라”라고 중대 결단을 내렸다. 즉 손병희를 자신의 뒤를 이을 동학 교단의 책임자로 선임했다. 이로써 3인의 집단지도체제는 손병희의 단일지도체제로 마무리됐다. 해월은 손병희에게 “우리 도를 잘 나타내서 후세에 편안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의암 손병희는 1861년 충청도 청주에서 중인의 서출이라는 신분제의 한계 때문에 사회적 성공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됐음을 안 뒤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품어 무리를 이끌고 불량한 양반과 유림을 응징하는 낭인(浪人) 생활을 했다. 그러나 동학이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종교임을 듣고 입도해 독실한 주문 수행으로 이전의 생활을 청산했다. 의암은 1880년대 후반 동학 교단의 주요 인물로 성장했다. 1892~3년의 교조신원운동에서 충의포 대접주로 활동했고, 1894년 동학혁명의 9월 총기포 때 해월로부터 통령으로 임명돼 전봉준과 함께 우금티, 원평, 태인 전투를 지휘했다. 동학혁명이 좌절되자 전봉준과 헤어진 후 임실의 해월을 강원도로 도피시키는 데 선봉에 섰다. 이후 김연국, 손천민과 함께 교단 수습과 재건에 공헌했다. 의암은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아 도인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해월은 고심 끝에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통솔력과 결단력이 뛰어난 손병희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 1878년의 전거론 마을 전경. <신인간>(통권 360호, 1978, 8・9합병호)에 표영삼이 전거론을 답사하고 찍은 사진. 당시 20여 호가 있었다. 사진 가운데 부분의 언덕 쪽에 임순호의 집이 있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오늘의 울산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