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강록(압록강을 건너)’-압록강에서 통원보

기획/특집 / 문영 시인 / 2020-03-18 09:51:54
다시 발로 읽는 열하일기

▲ 출전: 열하일기-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세계를 보라(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휴머니스트)


단둥에서

“6월 24일 신미(辛未)에 시작해 7월 9일 을유(乙酉)에 그쳤다. 압록강으로부터 요양에 이르기까지 15일이 걸렸다.”


‘도강록’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처럼 ‘열하일기’ 여정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됐다. 조선시대에는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면 호산에 닿았다. 호산은 지금의 중국 단둥시 삼강이 있는 지역이다. 북한 땅이 개방되지 않아 오늘날 <열하일기> 기행은 단둥이 출발지다. 단동의 옛 이름은 안동(安東)으로 청나라가 1876년 안동현을 설치한 데서 비롯됐다. 1907년 개항되면서 일제가 이곳을 대륙 진출의 출입문으로 삼았다. 중국이 지배하면서 1965년 안동을 단동으로 바꿨다. 


인천국제여객터미널에서 단둥행 여객선이 주3회 운항한다. 저녁에 인천항을 출발해 다음 날 아침 압록강 하류를 따라 단둥에 입항한다. 북한 신의주시를 가까이 볼 수 있어, 만주 일대와 백두산 관광 코스로 한국인들이 이용한다. 압록강을 제대로 보려면 이 코스가 적격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공편으로 심양에 내려 고속도로를 타고 단둥시로 내려왔다. 심양과 단둥은 220㎞로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단둥시는 압록강을 따라 형성된 도시다. 북한과의 교역은 대부분이 이곳에서 이뤄진다. 시내는 외국인들과 북한, 중국인들로 흥성거린다. 특히 호텔 안에는 아프리카인과 터번을 쓴 중동인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일제강점기 백석 시인은 단둥 거리를 거닐면서 “이방 거리는/ 콩기름 졸이는 내음새 속에/ 섶누에 번데기 삶는 내음새 속에// 이방 거리는/ 도끼날 벼르는 돌물레(숫돌) 소리 속에/ 중국 광대 켜는/ 중국 양금 소리 속에”(‘안동’)에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단둥시의 저녁 휘황찬란한 불빛 아래 드러난 압록강의 다리와 선정적 광고판을 달고 있는 유흥업소보다는 어둠 속에서 흘러가는 압록강의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펄조개 냄새를 맡고 맛보는 데 집중했다. 그것은 보고, 귀 기울여 듣고, 냄새 맡고, 느끼면서 얻는 체득, 즉 발로 읽는 기행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단둥 압록강철교


압록강과 호산, 일보과

북한 땅에서 솟은 해는 위화도를 사이에 두고 양 갈래로 흐르는 압록강 물줄기를 보여준다. 위화도는 북한 섬이지만 단둥과 가깝다. 이성계가 고려말 이곳에서 군사를 돌렸다. 역사에 기록된 위화도 회군이다. 단둥시 강변을 따라가다 보면 위화도에는 자그마한 아파트가 있고 강변에서 빨래나 낚시를 하는 북한 주민을 볼 수 있다. 위화도를 보면서 압록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삼강을 지나 애하대교를 건너면 호산에 이른다.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사신 일행이 첫발을 내딛는 곳이다. 

 

▲ 압록강 위화도


‘도강록’에서 연암이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을 보면, “물살은 매우 빠른데 뱃노래가 터져 나왔다. 사공이 노력한 보람으로 살별(유성)과 번개처럼 배가 달린다. 생각이 잠시 아찔해 하룻밤이 지나간 듯싶었다. 저 통군정(統軍亭)의 기둥과 난간이 팔방으로 빙빙 도는 것 같고, 전송 나온 이들이 오히려 모랫벌에 섰는데 마치 팥알같이 까마득하게 보인다”라고 했다. 물살이 빠르고 위태로운 순간을 실감나게 서술했다. 압록강을 건넌 연암 일행은 지금의 호산 부근에 도착해 갈대숲을 헤치며 나아갔다. 

 

▲ 우적도와 호산장성
▲ 일보과와 우적도


현재 호산에는 중국 측에서 호산장성을 쌓아 놓았다. 호산장성은 고구려 옛 산성인 박작성 성터을 허물고 명나라 만리장성 식으로 복원해 놓은 동북공정의 현장이다. 호산장성 꼭대기 망루에 오르면 의주의 통군정이 보인다. 조선시대와 달리 지금 호산 앞에는 압록강의 범람과 퇴적으로 중국과는 거의 붙은 북한 땅 ‘우적도’가 있다. 중국 쪽에서 ‘일보과(한 발자국만 건너면 갈 수 있다)’ 비를 세워놓았고 북한 쪽에서는 철조망을 쳐놓았다. 일보과에 있는 유람선 운행을 알리는 관광안내도와 호산장성 앞 상점에 태극기와 한국 지폐, 북한 지폐와 우표 등이 함께 진열돼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 호산장성 상점
▲ 호산마을 장터
▲ 호산장성


구련성

연암 일행은 호산에서 10리를 걸어 삼강에 닿았다. 삼강은 청나라 당시 애라하로 호산 서북쪽에서 나와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삼강에서 서남쪽으로 내려오면 조선사신들이 거쳐 간 구련성이 나온다. 구글 지도를 검색하면 구련성은 오늘날 단둥시 북동쪽에 있는 구련성진으로 표시돼있다. 현재 구련성 마을에는 옛날 구련성임을 표시하는 석비 두 개가 허술한 상점 앞에 놓여있다. 하나는 1983년 단둥시정부가, 다른 하나는 1997년 요녕성정부가 세웠다. 

 

▲ 구련성지 비


조선사신들이 노숙한 장소는 여기를 지나 서쪽으로 내려와 강이 인접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마부들은 다섯 명이나 열 명씩 어울려 냇가에 나무를 얽어매어 자리를 잡았고, 의주의 상인들은 시냇가에 닭 수십 마리를 잡아서 씻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고, 군뢰들이 호랑이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밤새도록 불을 피우고 나발을 불면서 경비를 했다”는 ‘도강록’ 6월 24일 기록이 그 같은 사실을 말해준다. 

 

▲ 구련성 마을


책문(변문진)과 봉황산, 봉황성

구련성을 떠나 서북쪽으로 오십 분 정도를 가면 책문에 이른다. 중국 국도 G304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봉황산이 보이고, 철길 건널목 바로 앞에 ‘변문진’이라는 표석이 놓여있다. ‘변문진’을 조선사신 일행은 책문이라 했다. 책문(柵門)은 ‘울타리로 된 문’이란 뜻으로 볼품없다는 말이지만, 당시 책문은 조선사신 일행이 입국 수속 절차를 밟는 곳이자 국경무역이 이뤄진 중요한 장소였다. 지금의 책문(변문진)은 과거의 성행했던 모습을 잃고 농촌 소읍 마을로 변했다. 

 

▲ 책문(변문진)


‘도강록’ 6월 27일 기록을 보면, 연암은 책문 가까이 있는 봉황산을 두고, 전체가 돌로 깎아 세운 듯 평지에 우뚝 솟아서, 마치 손바닥 위에 손가락을 세운 듯하며, 연꽃 봉오리가 반쯤 피어난 듯도 하다고 하면서 서울의 도봉산이나 북한산에 비해 신령스럽고 밝은 기운이 적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산속에는 안시성 옛터가 있단다. 성가퀴(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들 하지만 그건 잘못된 말이다. 삼면이 모두 깎아지른 듯 험해 나는 새도 오르기가 어렵다. 남쪽만이 좀 평평하긴 하지만 둘레가 수백 보밖에 안 된다. 이렇게 총알만한 성에는 당나라 대군이 오랫동안 머물지 못할 테니, 그곳은 고구려 때의 조그마한 보루였을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 봉황산성 고구려성벽


봉황산 산성이 안시성이 아니라는 연암의 주장은 맞는 말이다. 해방 이후 역사학계에서 봉황산 산성은 고구려 산성 중 가장 규모가 큰 오골성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런데 연암이 봉황산 산성을 고구려의 조그마한 보루라고 여긴 것은 책문(변문진) 가까이 있는 봉황산 산성 남쪽만 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남쪽 입구에는 중국 측에서 세운 ‘봉황산산성’ 표지석과 더불어 고구려 옛 성벽이 훼손된 채 방치돼 있다. 

 

▲ 봉황산성 정문

 

▲ 봉황성(봉성시) 자전거택시와 폭죽


책문(변문진)에서 북쪽으로 차로 10분 정도 가면 봉황산 정문이고, 이곳에서 10분 정도를 더 가면 봉황성이다. 봉황성은 오늘날 봉성시다. 봉성시는 인구 50만 정도의 지방도시로 만주족 자치시다. 1780년 6월 28일 연암은 이곳을 지나면서 봉황성 또한 안시성이 아니라는 주장을 거듭 설파한다. 그러면서 당시 새로 쌓고 있던 봉황성을 두고 “성의 둘레가 3리에 지나지 않으나 벽돌로 수십 겹을 쌓아 그 만듦새가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했다. 여기서 벽돌의 유용성을 주장하는 연암의 ‘벽돌론’이 나왔다. 봉황성은 지금 봉황시의 도심 북쪽에 있었는데, 성벽은 모두 헐리고 없어졌다. 봉황성이 있던 거리는 결혼식을 마친 차량과 폭죽 연기로 가득했다. 봉성시를 빠져나와 한 시간 정도 가면 통원보에 닿는다.

통원보

통원보는 연암 일행이 장마철 불어난 물 때문에 <열하일기> 여정 중 가장 오래도록 머물렀던 곳이다. 조선사신단은 통원보에 6월 29일 도착해서 비 때문에 앞 계곡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하고 6박 7일을 머물다가 7월 6일 떠났다. 통원보처럼 궁벽한 시골 마을에서도 연암은 투전이나 하면서 소일하는 다른 일행과는 달리 만주족 여성과 결혼 풍속을 유심히 살피고, 벽돌 가마와 ‘캉’(부엌과 방이 실내에 함께 있는 형태)을 만드는 제도인 구들 놓는 법을 관찰해 그 유용성을 설파하기도 한다. ‘이용후생’을 중시하는 실학자 연암의 모습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 통원보

우리는 통원보에 가기 위해 심단(심양-단둥)고속도로를 이용했는데 중간에 통원보 휴게소에서 내려 이 일대 풍경을 스케치했다. 지형을 살펴보니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강줄기가 모두 낮은 들판에 들어 서 있는 통원보 마을을 통과해 흘러간다. 물이란 물은 온통 이 마을 하천으로 흘러 들어오게끔 돼 있다. 


통원보 휴게소에서 지도책을 구입했다. 지도에다 가야 할 지명을 표시하면서 초하구를 지나 북쪽 연산관으로 갔다. 우리 팀은 연산관에서 심단고속도로를 벗어나 서쪽 요양으로 가는 옛길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공사 때문에 길을 잘못 들어 교두진이라는 마을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 마을 주민이 청석령으로 가는 길은 끊어지고 연암의 일행이 7월 7일 숙박했다는 낭자산과 냉정 사이의 옛길도 큰 댐이 건설돼 물속에 잠겨 버렸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우리는 연산관으로 다시 되돌아 나와야 했다.


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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