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내리는 고요한 한라산

기획/특집 / 노진경 시민 / 2020-07-22 10:06:25
행복 산행

최근 내도록 비가 왔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또는 날씨를 핑계로 계속된 실내생활 때문인지 몸이 찌뿌둥했다. 매일 몸과 정신이 깨어나지 않는 듯했다. 비지땀을 흘리는 쨍쨍한 여름 볕이 그리운 나날이었다. 


마산에서 중공업에 종사하는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요즘 무급휴직 중이고 제주라 했다. 그 문자를 받은 순간 ‘무급휴직’이라는 단어보다 ‘제주’라는 단어가 훨씬 더 크게 보였다. 바로 항공권을 검색했다. 주말 울산에서 제주 왕복 항공권이 총 7만 원. 아무 고민 없이 항공권을 구매했다. ‘나도 갈까 봐’하고 답장을 보냈다. ‘이번 주말 남자친구가 오기로 했는데?’라고 친구의 회신이 왔다. 그 문자를 읽으며 역시 혼자 다닐 팔자인가보다 했다. 


토요일 아침, 등산화 한 켤레, 등산양말 두 개, 등산복 한 벌, 비옷을 담은 가벼운 배낭 하나를 들고 제주로 향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드문드문 비가 왔고, 내도록 흐렸다. 제주공항에 내려 예약한 렌트카를 찾으러 갔다. 공항 여기저기 긴장감이 돈다. 

 

코로나19가 창궐한지 반년, 과학적으로 조심할 것들은 취하며 일상을 살고 싶지만, 여전히 사람이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낯선 이를 만나면 몸과 마음이 움츠려 든다. 마스크와 휴대용 손소독제, 되도록 피해를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챙긴 물건들을 본다. 굳이 이 시국에도 제주로 여행을 온 상황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황당한 모순 같아 피식 허탈한 웃음이 났다. 

 

▲ 마스크를 꼭 착용해달라는 현수막


예약한 차를 받아 창문을 활짝 열고 손소독제를 이용한다. 마스크를 벗어두고 달린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하다.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 사람도 별로 없어 더 좋다. 한라산으로 가는 길 운무가 그득한 길조차 사랑스럽다. 

 

▲ 산행 시작 전 모닝 커피 그리고 산수국
▲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영실 입구

 

얼마 만에 울산을 떠나 먼 곳으로 왔는가. 방랑병을 앓고 있는 필자에게 반년은 짧고도 길었다. 영실매표소를 지나 산의 들머리로 가는 길가엔 산수국이 곱다. 흰 운무를 배경으로 꽃의 파랑 보랏빛이 더욱 짙게 느껴진다. 이 자유의 단맛. 어떤 것에도 비할 수가 없다. 산행을 시작하니 흰 산딸나무꽃이 여기저기 피어 곱다. 비 맞아 촉촉한 나무들이 더욱 싱그럽다. 지금의 기분으로는 쓰레기를 만나도 반가울 듯하다.
비바람도 시원하고 상쾌하다. 영실기암을 병풍처럼 오른 쪽에 두고 오르는 길, 여기저기서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휘청인다. 바람에게 “항복”을 외친다. 그런다고 봐줄 바람이 아니다. 더욱 호되게 바람이 분다. 그래도 웃음이 난다. 

 

 

▲ 여기 저기 핀 산딸나무꽃
▲ 물길 따라 걷는 숲속 길

 

▲ 영실 코스

 

거센 바람 덕에 추워질 때쯤, 오르막 계단을 지나 구상나무와 주목군락지 사이의 길을 걷는다. 바람을 막아주는 숲이 포근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자연 속에 오니 아까 공항과 다르게 가슴이 열리고 몸의 긴장이 풀린다. 이 평온함 또한 감사하다. 

 

 

▲ 구상나무와 주목 사이를 걷는 데크길

 

▲ 선작지왓

 

숲을 지나니 선작지왓 평원이 나온다. 원래 탁 트인 경치로 백록담의 남벽을 보여주는 곳인데, 오늘은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멀리 보지 못하니 가까이 것들이 더 잘 보인다. 노루샘 근처 여기저기 곰취가 그득하다. 보랏빛 꿀풀의 꽃이 곱다. 자연이 멀리 보여주지 않을 땐 그저 가까이 보면 그만이다. 

 

▲ 아무도 없는 영실대피소 앞 데크
▲ 여기저기 붙어있는 거리두기 스티커

영실대피소에 도착하니 건물이 노후돼 폐쇄했다는 문구가 보인다. 다행히 바람도 비도 잠시 멈췄다. 아무도 없는 데크에 홀로 앉아 김밥을 먹는다. 까마귀들이 몰려온다. 까마귀의 눈빛에 죄스럽다. 왜 왔냐고, 좀 참아보지 그랬냐고 노려보는 눈빛 같다. 김밥이 잘 넘어가지 않아 배낭의 물을 꺼내 마셔 본다.


노진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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