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집에 병정이 온다

기획/특집 /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2019-10-11 10:19:18
해월 최시형 평전

오늘 우리 집에 병정이 온다

해월은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해 후계 구도를 정리했다. 해월은 동학에 입도한 지 2년 만인 1863년 8월 14일에 37세의 나이로 수운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다. 이후 동학 교단의 책임자로 35년간 고비원주(高飛遠走)하면서 동학의 교세를 키웠다. 71세의 고령이었던 해월은 앵산동에서부터 발병한 이질로 쇠약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계 구도를 신속하게 확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계 구도의 선정은 그의 마지막 숙제였다. 그러나 해월이 손병희에게 도통을 전수하자 김연국이 반발했다. 가장 오랜 기간 해월을 따랐던 김연국으로서는 자기보다 나이 어린 의암이 교단의 책임자가 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강원도 지역으로 떠나버렸다. 해월은 손병희와 손천민에게 김연국을 잘 타일러 함께하라고 거듭 당부했다. 


전거론에서 1898년을 맞이한 해월은 72세가 됐다. 신년 벽두부터 전거론에는 폭설이 내려 사람들의 왕래가 어려웠다. 해월의 아들인 동희(東曦)는 친구들과 집 마당에서 병정놀이를 했는데 그때 동휘는 “우리 집에 병정이 온다”고 말하면서 뛰어 놀았다. 동휘의 이 말이 해월에게는 마냥 어린아이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동학 교문의 큰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해월의 느낌대로 신년 벽두부터 이천 관아에서 해월에 대한 체포에 열을 올렸다. 이천 관아의 병정들이 경기도와 충청도를 쑤시고 다니면서 해월의 행적을 뒤쫓아 다녔고 동학 지도부를 체포했다. 1월 2일에 충주 외서촌 두의동(豆依洞, 음성군 삼성면 능산리)에서 이용구(李容九)가, 음죽군 앵산동(이천시 설성면 수산1리)에서는 해월의 사돈이었던 신택우(申澤雨)가, 그리고 이천군 보평리에서 권성좌(權聖佐)가 붙잡혔다. 이 세 사람은 이천 관아로 끌려가 해월의 은거지를 실토하라고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이들 중 이용구와 신택우는 끝까지 해월의 은거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권성좌는 매에 못 이겨 신사의 소재를 실토하고 말았다. 


권성좌의 체포 소식을 들은 이종훈이 여주의 임순호에게 달려가 “지금 권중천(權重天)의 집에서 오는 길인데 오늘 새벽 군관이 권중천 형제의 집을 포위하고 권성좌를 체포했으니 이리로 오기 전에 대책을 마련하라”고 전했다. 임순호는 이종훈의 전갈을 받자마자 밤길을 달려 전거론으로 가서 해월에게 권성좌의 체포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해월의 병세가 심한 데다가 날씨도 춥고 폭설이 내려서 어디로 피신할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이때 손병희의 동생 손병흠이 해월에게 피신할 것을 간청했으나 해월은 “급할수록 서두르지 말자[급즉완(急則緩)]”고 하면서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경우에는 다만 천명을 기다릴 따름이라”고만 하고 몸을 피하지 않았다.
 

▲ 갈현 고개. 해월이 전거론을 벗어나 찾은 곳이 지평 갈현(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으로 여기에는 제자 이강수의 집이 있었다.



김낙철이 관병을 속여 위기 모면

해월의 은거지를 실토한 권성좌를 앞세운 이천 병정 20명은 폭설을 뚫고 1월 3일 오후에 이천에서 출발해 여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인 1월 4일 오후에 전거론으로 들이닥쳤다. 전거론에 당도한 이천 병정들은 곧 해월의 집과 김연국의 집을 포위했다. 관병들을 먼저 길가에 있는 김연국의 집으로 들어가 김연국을 찾았으나 마침 김연국의 집에는 부안에서 온 김낙철(金洛喆)이 혼자 있었다. 권성좌를 앞세운 관병들을 김낙철에게 “최법헌(해월), 손응구(손병희), 김치구(김연국)는 어디 있느냐?”고 다그쳤다. 그러자 김낙철은 “나는 은진(恩津) 사람으로서 지나가다 5, 6일 전에 주인 되는 이모(李某) 씨가 훈학(訓學)을 해달라고 하기에 훈학하고 있는 중이다. 주인의 성은 이 씨로 알며 최법헌, 손응구, 김치구는 금시초문으로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병정은 “주인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김낙철은 “주인 이 씨는 엊그제 성묘차로 광주(廣州)에 갔다”고 둘러댔다. 이때 옆에 있던 권성좌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기갈이 심해 죽을 지경이니 침채(沈菜, 김치) 한 그릇과 냉수 한 그릇만 달라”고 청했다. 김낙철은 곧 내실로 들어가서 해월의 부인에게 이를 부탁했다. 그런데 해월의 부인이 병정이 급습하자 안색이 변해 사색이 됐다. 김낙철은 귓속말로 “사모님께서 낯빛을 변해 보이면 병정들이 눈치를 챌 것이니 마음을 편히 갖고 계시면 이 사람이 무사하게 하겠다”고 위로했다. 그리고 침채와 냉수 한 그릇을 떠다가 권성좌에게 주니, 권성좌는 단숨에 마시고 나서 “여기에는 최법헌이 없다”고 속여 다시 병정들에게 난타를 당했다. 권성좌는 다시 횡설수설하며 병정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 김낙철 부부 사진. <학산정갑수선생전기>에 실려 있다. 김낙철은 전거론에서 해월을 대신해 체포돼 서울의 경무청으로 인계돼서 고초를 겪다 해월이 체포된 6월에야 풀려났다. 학산 정갑수는 김낙철의 제자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호남의 천도교 지도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손병희의 기지로 관병을 물리쳐

권성좌는 관병을 이끌고 해월이 은거하고 있는 집으로 들이닥쳐 방문을 열고 욕을 했다. 이때 손병희가 관병들을 막아서 나서며 “무례하게 사대부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느냐? 팔십 노인이 몇 달째 병환으로 누워 계시는데 이렇게 무도할 수 있는가. 너희들은 아비 어미도 없느냐?”고 꾸짖었다. 그러자 병정 가운데 상급자가 하졸들을 꾸짖으면서 “저희들은 이 자가 동학 괴수가 이 집에 있다기에 체포하러 왔소”라고 말하며 권성좌를 불러 의암과 대질시켰다. 의암은 목침을 들어 문지방을 내리치면서 “이놈아 너는 어떤 놈이기에 사대부의 집을 동학 괴수의 집이라고 모함하느냐? 나를 자세히 봐라. 나를 알거든 안다고 해라”라고 호통을 치면서 권성좌를 때리려고 했다. 손병희가 눈을 부라리며 소지를 지르고 우격다짐을 하자 권성좌는 손을 내저으며 아니라며 물러섰다. 병정들은 권성좌를 끌고 나가 난타하며 바로 대라고 다그쳤다. 권성좌는 매에 못 이겨 횡설수설하다가 최법헌이 삿갓봉 마을에 있다고 했다. 병정들은 그를 앞세우고 십 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고개 넘어 삿갓봉으로 갔다. 권성좌는 마을 글방 선생인 김상률(金商律)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최법헌이라고 하자 병정들은 무조건 훈장을 포박해 끌어냈다. 가족과 동리 사람들이 달려들어 병정들에게 “동리 훈장을 무엇 때문에 잡아가느냐?”고 야단을 치면서 병정들을 막아서자 관병들은 훈장을 풀어주었다.
 

▲ 해월의 큰 아들 최동희(崔東曦). 최동희는 1919년 3.1운동 때 서울에서 참여한 뒤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1922년 7월 천도교의 독립운동단체인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를 조직해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에 선임됐으며, 연해주로 건너가 계속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1926년 고려혁명당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1927년 폐병으로 사망했다.


김날철이 해월을 대신해 체포돼

권성좌에게 속은 것을 안 병정들은 또다시 가혹하게 폭행했다. 권성좌는 다시 전거론에서 본 “은진서 왔다는 이가 바로 법헌이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튿날 전거론으로 되돌아온 병정들은 김낙철을 포박했다. 김낙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정들에게 끌려갔다. 김낙철은 ‘신하는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한 것처럼 제자 된 몸으로 선생을 위하여 죽는 것이 이치다’라고 결심했다. 김낙철은 해월을 위기에서 지키기 위해 자신이 대신 체포됐다. 김낙철은 도중에 권성좌에게 자신의 이름을 낙철이라고 하지 말고 영진(永鎭)이라고 하라고 서로 말을 맞췄다. 김낙철은 서울의 경무청으로 압송돼 이용구, 신택우, 전정읍과 같이 갇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김낙철은 해월이 체포된 이후 풀려났다. 


해월은 김낙철이 대신 잡혀감으로써 한숨을 돌렸으나 김낙철이 해월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병정들이 다시 전거론으로 찾아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더는 전거론에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전거론을 벗어나기로 했다. 그러나 대낮에 길을 나서면 마을 사람들의 의심을 받을 수 있어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전거론을 떠나기로 했다.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일행은 해월을 모시고 산길로 올라갔다. 임순호는 오래 전부터 장보교(帳步轎)를 준비해두고 있었다. 이춘경(李春敬)과 이춘원(李春元)이 장보교를 메고, 손병희, 김연국, 손병흠 등이 앞뒤를 호위했다. 임선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숲은 깊고 길은 험한데 어찌나 어둡던지 옆에 있는 사람도 잘 안 보이고 길은 눈에 쌓여서 어디로 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등불을 들고 길을 찾는데 의암성사(손병희를 높여 부르는 말)께서 멀리 불빛이 비쳐 오는 것을 보시고 내가 든 등불인가 하여 가보니 큰 호랑이가 앉아 있었다. 주저하고 계시다가 이윽고 호랑이가 사라지므로 호랑이가 앉았던 곳을 보니 길이었다. … 겨우 십 리 정도를 가서 산 밑에 초가집에 들어가 밥을 끓여서 시장기를 면한 뒤 지평군 갈현으로 갔다. 이강수의 집에서 며칠 있다가 홍천군 서면 제일동 오창섭을 찾아갔다.

해월 일행은 눈으로 뒤덮인 산길을 택했다가 길을 잃어버렸다. 손병희가 길을 찾기 위해 산을 헤치고 다니다 불빛을 발견해 민가가 있는가 하고 가보니 호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고 했다. 손병희가 호랑이를 보고 주저했는데 얼마 지나니 호랑이가 길을 떠나 사라졌다. 손병희가 호랑이가 앉았던 곳을 가니 길이 나 있었다. 손병희는 일행을 불러 그 길을 타고 산을 벗어나 십 리를 더 가서 민가 하나를 만나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해 지평군 갈현(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의 제자 이강수(李康洙)의 집까지 갔다. 

 

▲ 해월의 작은 아들 최동호(崔東昊).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은행 앞에서 만세시위운에 참여했고, 이어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적극 협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 제작에 참여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 서울에서 홍일창(洪一昌), 정창수(鄭昌洙) 등과 협의해 군자금 모집계획을 세워 추진하려다가 일경에 피체돼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사진은 당시의 모습이다.

 

그리고는 다시 길을 나서 홍천군 서면에 있는 제자 오창섭(吳昌燮)의 집으로 들어갔다. 오창섭은 가난해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서 오창섭의 사촌인 오문화의 집으로 해월은 다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10여 일을 머물다 1월 22일에는 홍천 방아재 용여수(龍汝洙)의 집으로 갔다. 해월 일행은 약 1주일 머물면서 안전한 은신처를 알아보았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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