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에서 해상풍력 허브로 다시 태어난 영국 헐

기획/특집 / 이종호 기자 / 2020-07-22 10:27:02
기획

그린뉴딜 ‘태풍의 눈’, 해상풍력

경제 침체를 딛고 항만 자산 활용한 재활 노린 항만도시 헐

영국의 험버(Humber) 지역에 위치한 도시 헐(Hull)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세 번째로 큰 대표적인 항만도시였다. 70년대 주력 산업이었던 수산업이 세 번에 걸친 대구전쟁(Cod War)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곧이어 석탄 및 철강 수출입을 위한 항만의 역할을 하게 되면서 헐은 영국 물류의 핵심지역으로 인정받게 됐다. 하지만 근대 산업화 바람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금융위기가 찾아와 부두의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그렇게 20여 년의 지속적인 침체로 헐은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로 전락하며 2013년에는 구직수당 지급액이 가장 높은 도시 중 한 곳이 됐다. 헐의 경제적 어려움은 지역 내 낮은 고용률, 주택시장 폭락, 기술 및 교육이 결여된 인력과 더불어 영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외면할 만큼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인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더 이상 내려갈 바닥이 없다고 생각들 즈음, 정부에서는 ‘헐 도시계획’ (Hull City Plan)을 내놨다. ‘헐 도시계획’은 2013년부터 2023년까지 10년 동안 도시의 경제·사회적 여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로, 지방정부의 주도로 친환경 항만 재생사업 추진, 해양 재생에너지 개발, 노후·유휴조선소와 부두를 활용한 해양문화 도시 프로젝트 등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 10년 계획 중 한 축이 바로 ‘에너지 도시’ 육성이었는데, 때마침 영국은 제3차(Round 3) 해상풍력단지 개발 프로젝트에 돌입해 한창 해상풍력을 공격적으로 키워내는 데 시동을 걸어 영국 북해(North Sea)에 세계 최대 규모의 혼시(Hornsea) 해상풍력단지 프로젝트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정부와 지자체는 이를 바탕으로 헐을 영국의 재생에너지 허브로 육성하고 항만 및 무역자산을 기반으로 한 지역경제 성장을 유도하고자 했다. 헐은 이미 항만 물류 산업의 인프라가 구축돼 있는 상태였고 덕분에 더 수월하게 잠재적 해상풍력 허브로 주목을 받게 됐다.
 

▲ 혼시 해상풍력 프로젝트 1(출처: Paul-Langrock.de)


‘에너지 도시’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으로 새로운 국면 맞아

‘에너지 도시’가 되기 위해 시작된 대표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가 바로 ‘그린포트헐’(Green Port Hull)의 건설이었다. 2014년 3월 세계적인 엔지니어링 기업 지멘스 가메사(Siemens Gamesa)와 영국 내 21개 항만을 소유 및 운영 중인 ABP(Associated British Ports)사는 헐의 알렉산드라 부두 (Alexandra Dock)에 3억1000만 파운드(한화 약 4700억 원)를 공동투자해 유럽 최대의 해상풍력 터빈, 날개, 부품조립 등 제조시설을 설립하기 위한 계획을 발표했고, 곧이어 공급망 인프라가 구축되기 시작했다. 발표 당시 제조시설 건설 과정에만 1000여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린포트헐의 제조시설은 세계 최대 규모의 해상풍력단지인 혼시 해상풍력단지 프로젝트 1에 부품을 공급하게 되며 이는 곧 헐을 영국 해상풍력산업의 핵심지역으로 탈바꿈시키는 계기가 된다. 지역주민들은 스코틀랜드 애버딘(Aberdeen)이 70년대에 석유 발견 후 급격히 에너지도시가 된 것과 같이 헐도 마찬가지로 해상풍력산업을 기반으로 대표적인 재생에너지 허브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혼시 프로젝트 1에 이어 그 규모를 능가하는 1.4GW 규모의 혼시 해상풍력 프로젝트 2는 2022년 완공 예정으로, 프로젝트 2에 사용될 터빈 165개 중 대부분의 물량 역시 헐에서 생산된다. 혼시 해상풍력 프로젝트 2 건설로 약 2000여 개의 고용증대가 이루어지며 완공 후 25년간의 운영기간 동안 130여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형성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헐은 혼시 뿐만 아니라 다양한 해상풍력 프로젝트에 터빈 등 부품과 관련 서비스를 공급하고 있다. 영국 정부가 민간 투자 유치와 정책적 지원을 통해 힘을 실어준 덕이 크다. 영국 동남부 서퍽 (Suffolk) 해안에 위치한 갤로퍼(Galloper)와 EA1(East Anglia ONE) 해상풍력단지에 사용된 터빈 날개 역시 헐에서 생산됐다. 갤로퍼와 EA1 해상풍력 프로젝트에는 영국의 대표적인 재생에너지 투자/개발 기업 그린인베스트먼트그룹(Green Investment Group, 이하 ‘GIG’)이 참여했다. 2012년 영국 정부가 설립한 그린인베스트먼트뱅크(Green Investment Bank)를 전신으로 하는 GIG는 영국 내에서만 6GW에 달하는 규모의 해상풍력 프로젝트들을 진행해왔다. 이는 영국 해상풍력 생산량의 50%를 차지하는 규모로, GIG가 영국의 해상풍력 산업을 견인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GIG는 현재까지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로 손을 뻗어 확장하고 있으며, 최근 우리나라 울산의 부유식 해상풍력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GIG는 현지 공급망과의 파트너십을 중요한 요인으로 보고 있어 울산에서 진행하는 모든 해상풍력 부품을 국산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혼시 해상풍력 단지 1,2(출처: Dong Energy)


투자, 연구개발, 공급망 연합으로 해상풍력 경쟁력 구축

헐의 부활에는 지자체 주도하에 이뤄진 지역경제 활성화 계획과 함께 민간 투자 유치, 산학협력 및 연구개발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해상풍력산업 연구개발의 중심엔 ORE 캐타펄트(Offshore Renewable Energy Catapult, 이하 ‘ORE’)가 있다. ORE는 영국 해상풍력을 비롯한 해양에너지 기술 개발 및 연구의 핵심축을 담당하고 있는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해양에너지 분야에서의 기술연구, 안전성 인증 시험 및 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혼시 해상풍력 프로젝트 2 개발 계획이 발표된 후, 2017년 말 ORE는 헐 대학(University of Hull)과 200만 파운드를 들여 해상풍력 관리 운영 센터(Operation and Management Center of Excellence)를 론칭했다고 밝혔다. 센터에서는 2018년부터 5년간 전문가 및 업계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해상풍력 비용 절감, 유지관리 및 운영 분야에서의 긴밀한 연구가 진행돼 오고 있다. 헐이 자리한 험버 지역에는 글로벌 해상풍력 기업들의 설비들을 비롯해 ORE와 헐 대학, 팀험버 해양연합(Team Humber Marine Alliance, 이하 ‘THMA’) 등 다양한 해상풍력 관련 산학연이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있다. THMA는 영국의 해상풍력 분야 비영리기관으로 해상풍력 운영사와 오일·가스기업, 연구소 등 200여 개의 회원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해상풍력 공급망과 배후항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THMA는 해상풍력 공급망에 속한 기업들을 위한 전문가 자문을 제공하고 이들이 영국과 글로벌 시장에서의 사업기회를 포착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지원해왔으며, 헐을 비롯한 험버지역에 구축된 공급망을 해상풍력 산업의 엔진으로 육성하는 데 한몫했다.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에서 해상풍력의 중심으로 다시 일어서다

헐이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에서 해상풍력의 중심이자 문화관광 도시로 재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지자체의 해양도시계획 수립과 이를 위한 친환경 항만 건설, 해양신재생에너지단지 조성 및 에너지연구아카데미 설립 등 적극적인 공공·민간 차원의 노력이 자리하고 있다. 헐의 도시계획과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 드라이브 덕분에 헐의 지역경제는 되살아나고 있다. 헐의 고용률 증가와 도시의 총 부가가치는 2014년 기준 50억3800만 파운드(한화 약 7조6000억 원)로 추산되며, 2013년에 비해 1인당 부가가치는 542파운드(한화 약 82만 원)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지멘스의 투자와 정부 지원으로 총 2600만 파운드(한화 약 393억 원)가 투입돼 그린포트 성장 프로그램(Green Port Growth Programme)이 조성됐는데, 이를 통해 지역주민들을 상대로 한 고용창출, 직업교육뿐만 아니라 기존의 현지 기업 중 해상풍력 산업에 동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시장진출 지원, 경영자문 등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들이 제공되고 있다. 나아가 헐은 재생에너지 개발뿐 아니라 유휴 항만부지의 관광시설 등을 조성해 2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또한 해안에 있는 다양한 시설물과 주거지 등을 보호하기 위해 지역 침수방지기반시설에 2억 파운드(한화 약 3025억 원)를 투자하고 해양박물관, 조선소 선박 복원 등 헐의 역사 깊은 해양자산을 활용해 해양문화도시로 거듭나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집행했다.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한 노력과 성과를 인정받아 2017년에는 영국 문화미디어체육부(Department of Culture, Media, and Sport)에 의해 ‘문화 도시’(UK City of Culture)로 선정돼 문화·예술 관련 행사들이 개최되며 다시 한번 범국가적 주목을 받았다. 헐은 해양경제와 사회문화의 조화를 이룬 도시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후 2019년까지 영국의 싱크탱크 데모스(Demos)와 경영컨설팅기업 PwC가 공동 발표하는 도시 성장 보고서(Good Growth for Cities Index)에서 주거환경 및 산업·경제적 수준이 가장 많이 향상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2013년 이후 재생에너지 부문을 비롯해 의료보건, 통신, 항만, 관광 등의 분야에서 6000개가 넘는 일자리가 창출되고 30억 파운드가 넘는 투자를 유치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한때 황무지로 전락했던 헐의 항만 인프라가 기반을 받쳐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 헐 알렉산드라 부두에 위치한 해상풍력 제조시설 전경(출처: greenporthull.co.uk)

영국 헐은 한국이 해상풍력 육성에 있어 모범이 되는 사례다. 헐과 같이 울산도 조선업 강자로서 황금기를 누렸고, 전 세계적 금융위기에 이은 산업 침체로 인해 지역경제도 활기를 잃어갔다. 영국 정부의 강하고 일관된 해상풍력 정책 방향과 민간 투자 협력은 헐이 해상풍력 분야에서 잠재력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했고, 이에 대한 상호작용으로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현지 기업들과 헐의 활약은 영국을 해상풍력 강국으로 키우는 데 일조했다. 그렇다면 울산과 한국의 현 상황은 어떤가. 울산 역시 조선업의 침체로 실업률이 치솟고 지역경제 전망도 어두웠던 항구도시였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울산의 경제를 지탱해왔던 조선업/해양플랜트 인프라와 기술력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뿐만 아니라 국내에는 해상풍력의 터빈, 날개, 타워, 해저 전선 등 부품 제조 분야의 강소기업들이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울산에서는 이 기업들과 대학, 기관 등이 협업해 기술 국산화 등 연구개발에 힘 쏟고 있다. 최근 발표된 정부의 그린뉴딜에 힘입어 해상풍력 육성을 위한 일관된 정책적 지원, 민간 투자 협력, 그리고 지자체 및 지역사회와의 밀접한 소통이 유지된다면 울산 역시 조선업 침체라는 그림자를 벗어나 새로운 성장동력을 구축하게 될 것이라고 글로벌 시장과 업계 관계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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