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 촛불동네

문화 / 배성동 소설가 / 2020-07-30 10:45:44
나는 숲이다 호랑이가 온다(18)

▲ ⓒ문정훈


반구대 촛불동네 사람들

사연댐의 마지막 뱃사공이 사는 촛불동네 한실(大谷) 마을을 찾아갔다. 지금이야 울산에서 가장 오지로 손꼽히지만 사연댐이 들어서기 전만 해도 술도가, 한지공장, 분교가 있었던 큰 마을이었다. 술도가 주막에는 대곡천 비알을 왕래하던 길손부터 한실 쇠부리꾼, 소암골 산판꾼, 백닭골 통수쟁이, 옹태골 독쟁이, 새연골 벼루쟁이들로 성시를 이뤘다. “한 노인의 생애사는 박물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귀한 생애사를 듣는데 맨손으로 갈 순 없죠.” 선물꾸러미를 든 서위탄이 한실마을을 들어오면서 한 말이었다. 


마을 끝자락에 있는 박수성 씨 가옥은 요즘 보기 드문 흙집이었다. 마당에서 수수 빗자루를 만들고 있던 박 할아버지에게 인사했다. “아, 야매꾼 왔구나.” 박 할아버지의 특유한 인사말이었다. 야매꾼이란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산을 다니는 사람을 말한다. 나는 박 할아버지에게 호랑이클럽 멤버들을 인사시켰다. 방대한 원시림에서는 날고 기는 모험가들이었지만 박 할아버지의 눈에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이 냥반 대단한 야매꾼이요. 내가 말하는 걸 다 적어. 그래가꼬, 일일이 찾아댕긴다 해도. 아무리 생각하면 뭐하노? 잊어버리면 그만이제.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죽기 살기로 적는 이 냥반, 그게 뭐가 돼도 돼.” 


내가 박수성(1929년생) 옹을 만난 것은 그가 사연댐 뱃사공을 할 무렵이었다. 그동안 박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중에는 반구대 구신방구나 병풍바위, 글씬방구, 용말바위, 천질방구 같은 듣도 보도 못한 지명들도 있었고, 물에 잠긴 명문(名文) 혹은 공룡발자국 등 제2, 제3 암각화 발굴에 도움이 될 만한 구술도 더러 있었다. 나는 박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구술을 메모하고 현장 발품을 팔았다. 발길이 못 미치는 곳은 배를 타고 들어갔다. “할아버지, 반구대암각화에 그려진 바위그림 아시죠?” 서위탄은 준비해온 선물꾸러미를 들고 박 할아버지에게 다정다감하게 접근했다. 그녀는 멀거니 서 있는 귀동냥꾼들보다 한 수 위였다. 


“응? 뭐라꼬? 귀가 어두우니 크게 말해.” 보청기를 끼고도 큰소리로 말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하는 구순 노인네 곁으로 바짝 다가간 서위탄은 고래고함을 지르듯 말했다. “반구대 바위그림 말예요, 그걸 첨 본 게 언제냐고요.” “아, 반구대 돌방구 각카(각화) 말가?” “네, 반구대암각화요.” 말귀를 알아들은 박 할아버지가 남다른 대곡천 야사를 주절주절 풀기 시작했다. “어, 그게 말이야, 내 발가벗고 멱 감던 시절이지. 내가 돌방구 각카를 첨 보기론 한실핵교 2학년 무렵일 거야. 그때만 해도 왜정 때라 4년제였지.” 박 할아버지가 말하는 각카란 각화의 깡촌 말이다. 어떨 때는 절벽방구, 돌방구라는 말도 썼다. 또 반구대암각화 계곡을 구신골(龜神谷) 혹은 큰들보 앞강이라 부르기도 했다. “할아버지, 어릴 땐 그 반구대그림이 선명하던가요?” “어, 그 기림(그림) 말이야, 높다란 데라 잘 안 보였어. 물에 빠지고 난 후론 배 타고 가야 코앞에서 볼 수 있었지.” 1965년 사연댐 담수를 시작한 이후 줄곧 만수위를 유지해오던 터라 큰 가뭄이나 들어야 볼 수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반구대 밑창바닥엔 그림 천지야

“할아버지가 처음 봤을 땐 뭐가 보였어요?” “아이고, 그걸 우찌 잊아뿌겠노. 범이 보였어. 꼬리가 긴 범. 그전엔 마을 뒷산에도 내려왔던 놈이라 알아.” 반구대암각화를 최초 발견한 연구원도 표범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고 회상했고, 제보자였던 집청정 최경환 어른도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는 말을 연구원에게 전했었다. “거기 반구대암각화 물가, 어릴 때부터 늘 다녔던 데잖아요. 강이 깊었을 텐데 위험하진 않았어요?” “그저, 큰들보 풀밭에 소 풀어놓고 친구들과 앞강 헤엄쳐 건널 정도야. 지금보다사 한창 밑창바닥이지. 그라몬 미끈한 암천방구가 쫙 강바닥에 깔려 있었거든. 거기 절벽방구에 기림 기리져 있었단 말이야.” “높이는 어느 정도였어요?” “음, 그게 말야, 기림 높이가 초가집 지붕만큼이나 높았거든. 멱 감다가 절벽방구 보려면 사다리 두 개 타야 돼. 사다리를 놓고도 팔이 겨우 닿는 데니깐. 한 개 타고 올라가면 근근이 볼까 말까 해.” 어린 그의 눈에 지표면에서 바위그림이 그려져 있는 곳까지는 5~6미터 가량이었다는 말이 된다. 


“할아버지, 그 당시 사진을 보면요, 호랑이 표범 모두 선명했거든요. 지금은 그렇질 못해요.” “그야 뭐, 김장 배추처럼 절여 놨으니 어쩌겠노.” 당시 최초 발견한 연구원도 불어난 사연댐 물 때문에 연말에야 반구대암각화를 직접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암각화가 처음 발견될 무렵만 해도 6년간이나 물속에 잠겨 있었던 것이다. 대곡천에 칼바람이 불던 그날은 마침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반구대 함지배에는 집청정 최경환 어른과 서울에서 내려온 연구원이 타고 있었다. 이 함지배는 사연댐이 들어서면서 고립무원이 된 대곡 주민들에게 내어준 목선이었다. 함지배가 출발한 곳은 반구대 바로 아래에 있는 반구대나루였다. 함지배를 타고 간 서울 연구원은 암각면 전체를 다 보지 못하고 노출된 윗부분만 근탁을 했다. 물에 자맥질하던 암각화가 완전히 노출된 2년 후에야 비로소 전체 탁본을 마쳤다. 


“각카가 처음 발견될 땐 별 관심 못 받았어. 지금도 동네사람들은 욕 태박이로 해. 뭐할라꼬 발견해서 동네 시끄럽게 하는지 몰라.” 박 할아버지의 말대로 발견 이후 동네는 날이 갈수록 시끄러워만 갔다. 발견 이후에도 무관심 속에서 잠겨 있던 반구대암각화는 고래 상업포경이 금지된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몇 해 전에는 반구대주민을 자처하는 정체불명의 다수가 서울 문화재청 전문위원들이 탄 버스가 마을에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바리케이드로 막고 꽹과리를 치면서 요란을 떨기도 했다. 


“글쿠 말야. 이 비알에는 골짝마다 흩어져 있는 돌방구 발자국도 천지야.” 대곡천 구석구석 발길 닿지 않은 데 없는 박 할아버지는 공룡화석발자국이 있는 곳도 빠삭했다. “서석골 넓쩍소처럼 말야, 주로 널찍한 마당바위에 보이지. 반구대 구신골짝도 서석골 못잖아. 거기 천지 삐깔이야. 어디 그뿐이던가. 반구대 오곡암, 옹태골 병풍바위, 이영구부, 한실 소암골, 세연골, 곡연골, 독도골, 골짝골짝 발 닿는 데마다 있어. 그땐 공룡발자국인 줄 몰랐지. 우린 그저 용발자국, 호랑이발자국이라 했지······.” 마을사람들 사이에서는 명산장수가 말을 탄 채로 뛰어내린 용말발자국으로 전해온다. 또 용과 호랑이가 설치는 골짝으로, 큰 발자국은 용발자국, 작은 발자국은 호랑이발자국이라 했다. 


배성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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