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걷기의 절경, 도산구곡과 청량산

문화 / 이동고 기자 / 2020-02-14 10:52:23
발로 쓰는 자연이야기

▲ 퇴계 선생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의 풍경은 도산구곡 중 고산정에서 청량산 입구에 이르는 구간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동고 기자

 

[울산저널]이동고 기자= 이번 낙동강 걷기 출발지인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고산정(孤山亭)은 도산구곡 중 8곡인 고산곡에 있는데 안동과 봉화의 접경인 가송리 마을에 있다. 끝물이 보이는 산허리를 물길이 끊어 두 개의 절벽으로 갈라놓았는데 고산정이 앉은 자리가 외병대이고 그 반대편이 내병대이다. ‘병’은 바로 병산서원처럼 병풍이다.

 

도산구곡 전체는 오천 군자리에서 청량산 입구까지 무려 50리 길이다. 이 길은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깊은 관계가 있다. 퇴계의 성정은 아름답고 맑은 자연산수 속에서 만들어졌다. 구곡문화는 주자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가파른 계곡에 맑은 물이 흐르면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곳으로 전국 어디에나 있다. 울주군 대곡천에도 구곡문화가 있었지만, 울산도 경북지역도 그 많은 절경 대부분은 댐 건설로 인해 물속에 잠겼다.


청량산을 향해 걸어가는 강과 바짝 붙어 걸어가는 길은 유빙이 흐르고 물색은 비취색이었다.
절벽은 퇴적암이 잘려 깎아지른 병풍을 이루고 곳곳에 역암(礫岩, 자갈이 박힌 바위)이 널렸다. 이 도산구곡은 퇴계 선생이 어릴 적 또래 아이들과 같이 놀던 곳이고, 조금 커서는 공부를 위해 형과 함께 청량산으로 세상을 일찍 등진 아버지를 대신한 숙부인 송재 이우의 거처를 찾아 오르내리던 길이였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던 퇴계선생은 늦은 나이인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첫 벼슬길에 올랐지만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돌아온 것은 나이 50여세를 넘기고서였다.

 

49세 되던 해 풍기군수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뒤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돼 잠시 복직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이내 물러나고, 53세 이후로는 잦은 조정의 부름에도 병을 핑계로 사퇴를 반복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 선생이 병약했던 건강문제도 있었지만, 당시 을사사화(1545)에 이어 양재역 벽서사건(1547)은 존경하던 동향 선배인 충재 권벌과 회재 이언적이 귀양을 가게 했고, 이후에는 평소에 따르던 넷째 형마저 태형 끝에 귀양길에서 객사하는 불운을 겪는다. 이는 퇴계로 하여금 은퇴를 결심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퇴계의 중요한 학문적 업적은 낙향 직후인 50세 초반부터 70세로 죽을 때까지, 약 20여 년간 시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우리 길은 강을 따라 걷는 길. 청량산 입구에 있는 청량교를 넘어 계속 강따라 나아갔다. 다리에서 강 아래쪽을 바라보니 협곡 사이로 흐르는 물이 사진으로만 본 중국 장가계 풍경과 비교해도 부족할 것이 없었다.
이제는 봉화지역이다. 강변에는 벌써 갯버들 버들강아지가 피어나고 있었다. 오마교를 건너 얼음이 언 사이로 물이 흐르는 관창폭포를 보고 다시 돌아와 강변을 걸어 봉화군 명호면에 도착했다. 명호천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은 황톳물로 아주 탁하다. 명호천 상류는 70년대까지만 해도 냉수성 어종인 열목어가 오르내리던 지구상에서 가장 남쪽의 열목어 서식지였다고 한다. 열목어는 광산개발에 따른 수질오염으로 자취를 감추었다가 탄광들이 문을 닫으면서 수질이 좋아진다고 들었는데 무슨 개발이 이뤄지나보다. 이 물이 옥빛 낙동강 물과 만날 것으로 생각하니 허탈하다.

 

명호천과 낙동강 본류가 만나는 이 곳에 낙동강 시발지라는 표지석이 있다. 강이라 붙일 수 있는 수량과 규모를 생각한 모양인데 낙동강은 하나인데도 그 해석은 여러 가지다. 읍내 식당에서 버들치 튀김과 민물매운탕으로 배를 채웠다. 대충 봐도 버들치, 쉬리, 꺽지,돌고기, 쏘가리, 참마자, 모래무지 등등이 들었다. 이번 강 걷기는 차도 가져온 지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 이런 글귀를 핑계 삼아 청량산을 오르기로 했다.


청량산에 대한 퇴계의 애정은 각별났다. 관직에 있는 동안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는 호를 쓰기도 했고, 벼슬에서 물러나 돌아온 뒤에는 청량산을 아예 `오가산(吾家山, 우리 집안 산)`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청량산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명산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 해발 800m 내외에 12개 암봉(岩峯)과 12개의 대(臺), 8굴과 우물이 4개나 좁은 구역에 빽빽이 어우러져 있으니 기암괴석이 주는 위요감과 신성함은 저절로 찬사가 나오게 만든다.


청량산에는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역암, 사암, 이암층이 융기와 풍화, 그리고 차별침식 등으로 다양한 지형이 나타나고 있다. V자곡이 발달된 계곡 주변엔 소규모의 수직·수평절리에 의한 풍화혈과 타모니 등이 발달해 특별한 경관을 보여준다. 청량사 역시 가파른 길을 타고 올라가면 절벽 수준의 봉우리 중턱에서 마치 마추피추 유적처럼 가람들이 층을 이루고 있다. 전체를 놓고 볼 때 청량사 자리는 연꽃의 꽃술 부위에 해당된다고 한다. 퇴계 선생이 ‘청량산인’을 자신의 호로 한 삼은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산사음악회를 처음 연 곳도 이 곳이라 하니 기암절벽이 병풍을 친 공간에서 나온 음들이 어떤 아름다운 공명을 냈을까 궁금해진다.

 

서쪽으로 기우는 햇빛이 절벽에 세워진 7층 석탑을 비스듬히 비추고 한 여인이 탑돌이를 한다. 청량산 맞은 편 산성마을에는 고려 공민왕 위폐가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모셔져 있는 사당이 있다. 1361년 2차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 곳으로 온 공민왕은 백성들의 환대를 받았다. 결국 그의 개혁정치는 신하들에게 죽임을 당한 비극적인 결말로 끝난 애처로움이 내내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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