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대범불

문화 / 배성동 소설가 / 2020-06-25 10:56:48
나는 숲이다 호랑이가 온다(13)

▲ ⓒ문정훈


눈에 불이 철철 흐르는 범불

“첩첩산중 골짝이구나.” 앞장선 김이장이 연화산 자락의 어두매 계곡을 열었다. C자 능선을 넘으면 대곡댐 자락이 보였다가 다시 U자 능선을 타면 사연댐이 나타났다. 우리는 대곡천 아홉곡(九曲)을 에워싸고 있는 긴 산군을 돌고 있었던 것이다. 산중 화전촌에 들어서자 흔히 보이는 논두렁 밭두렁은 보이지 않고 마늘쪽 산들만 거듭됐다.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이토록 깊은 화전촌이 있다는 사실에 모두가 의아해했다. 김이장 말로는 벌목하던 산판꾼이나 쇠를 제련하는 쇠부리꾼들이 드나들던 골짜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반구대범굴에 살았던 범과 끊임없는 갈등이 빚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빈집으로 남아 있는 화전막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심마니가 지나갔는지 타다 만 솔가지 재와 까맣게 그을린 돌이 뒹굴었다. 마른나무가지로 불을 지피고 야전식량으로 끼니를 때웠다. 


모두가 잠든 시각, 서위탄은 화전막 마당에서 밤하늘의 별무리를 촬영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울창한 나무숲이 울어댔다. 찬란한 밤하늘의 별자리를 올려다보던 서위탄은 오늘 낮에 탐사한 반구대범굴을 들먹였다. “낮에 본 반구대비녀굴 말예요.” 물불 안 가리고 들어갔던 1번굴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난 그 글에서 기생충에 물렸는지 온몸이 근질근질해.” “그래요? 전 괜찮아요.” 서위탄은 비녀굴의 의문이 풀리지 않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내부 공간에서 울리던 공명으로 봐선 완전히 막힌 동굴이라기보단 다른 통로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비녀굴의 비밀은 경주 첨성대랑 비슷해요. 밤하늘의 수호자 첨성대가 1400년째 지진에도 끄떡없는 것은 축조비결에 있어요‧‧‧‧‧‧.” 


그때 숲속을 스쳐 가는 불빛이 보였다. “가만, 저기!” 움칫 놀란 내가 불빛이 있는 숲을 손짓했다. 숲의 은둔자 올빼미인가. 그 순간 나뭇가지가 일렁이고 광채가 움직였다.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나는 얼른 광채가 발하는 숲으로 플래시를 비췄다.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광채와는 오륙십 보 거리였다. 나와 서위탄은 어둠을 꿰뚫어 보는 안광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때 가르랑거리는 날카롭고 위협적인 소리가 숲의 정적을 깨트렸다. 놀란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커다란 동근 눈깔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눈빛에 모든 것이 정지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와 서위탄은 꿰뚫어 보는 광채 앞에서 결연했다. 러시아 타이가 탐사를 하면서 이보다 더한 일도 겪었다. 이럴 땐 고함을 지르거나 뒤로 뛴다면 낌새를 알아차리고 덤벼들 수 있었다. 나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한발씩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적의가 없는 상대를 확인한 광채도 천천히 물러서는 것 같았다. 슬그머니 사라지는 광채는 의외로 부드러웠고, 앞으론 조심하라는 경고 같았다. 화전막으로 돌아오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아침이었다. 졸던 나무들이 깨어나 바람을 타고 있었다. 나는 지난밤의 광채를 확인하기 위해서 호랑이클럽 멤버들을 데리고 숲으로 갔다. 새알처럼 박힌 붉은 꽃술을 가진 함박꽃 잎새들이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개울을 건너는 물가에 밤새 다녀간 광채 발자국이 보였다. 언뜻 보기에도 웬만한 사냥개 발자국보다 컸다. 한박사가 개울가로 내려가 발자국 사이즈를 쟀다. “어제 본 그 납떡범 발자국이요. 대곡천 물가에서 가재 잡아먹으러 내려온 이 놈 땜에 초소 경고등이 울린 적이 있었소.” 천전리각석 초소지기로 일한 경험이 있는 김이장이었다. “발자국 사이즈로 봐서는 멀리 못 갔소. 뛰어봤자 십리도 못 갈 놈이요.” 노루 때려잡은 막대기 석삼년 우려먹는다더니 김이장은 재탕 삼탕을 거듭했다. “그럼 표범?” 서위탄이 한박사를 쳐다봤다. “사이즈나 행태로 봐선 표범일 가능성이 있어요. 여길 봐요.” 남한지역에 한국표범의 존재를 믿는 한박사가 낙엽과 함께 찍힌 발바닥 앞부분을 가리켰다. “사냥개나 너구리와는 달리 앞발톱이 안 찍혔어요. 2004년 지리산표범 발자국을 직접 확인한 적 있어요. 러시아 학자 불러 지리산에 찍힌 발자국을 감식한 결과 표범임이 확인됐어요. 2010년에는 강원도 민통선 백운산에서 표범과 마주친 사람 제보도 있었고요. 표범이 한국에 살고 있는 건 분명해요.” 조심스럽고 은밀한 표범은 사람 눈에 잘 띄지 않는 짐승이다. 거미줄처럼 깔린 러시아 중국 국경지대에 설치한 CCTV에도 좀체 포착되지 않는 영리한 놈이다. 작은 돌 하나만으로 몸을 숨긴다는 표범을 육안으로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한박사는 표적이 잡히기 좋은 나무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배터리와 SD카드를 점검했다. 카메라트랩은 밤에 움직이는 동물뿐만 아니라 뒹구는 낙엽까지 잡아낸다.

범불이 읽어낸 만 권의 역사책

범불은 연화산 어두매 골짜기를 소리 없이 걷고 있었다. 산 아래를 굽어볼 수 있는 꼬불꼬불한 능선을 물레 타듯이 돌고 돌았다. 범불은 대곡천 야산 계곡에서 사냥감을 찾아다니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다. 밤이슬을 피할 보금자리를 찾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때 인적이 드문 골짜기에서 뜻밖의 불빛을 보게 됐다. 외진 화전막에 인간들이 있는 것을 낌새챈 산군은 소리 없이 다가갔다. 밤하늘을 보고 있던 두 인간이 내 안광을 본 것 같았다. 두 인간은 섬광처럼 반짝이는 플래시를 들고 다가왔다. 범불은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향해 가까이 오지 말라는 가르랑거리는 경고를 보냈다. 그 정도 경고면 웬만한 사람이면 그 자리에서 얼어버리는데 대범하게도 나를 향해 플래시를 계속 쏘았다. 큰 불빛에 눈이 부셨다. 순간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저 인간들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후 인간들이 물러섰다. 나도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인간은 반드시 보복하는 위험한 족속임을 잘 알고 있다.


오늘 순찰 돈 동뫼산은 나지막한 바위산이다. 잘록한 바위 능선의 낙엽 쌓인 자드락길은 내가 딱 좋아하는 순찰 코스다. 바위산 뒤 표시목에 몸을 문지르고 오줌으로 영역 표시를 해뒀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털갈이를 위해서 자주 문질러야 한다. 산군은 푹신한 방석 같은 이끼가 깔린 양지바른 바위 위에 조각상처럼 앉았다. 굽은 강이 내려다보였고, 질매재 8부 능선 바위 아래 있는 보금자리도 보였다. 강 아래 겹겹이 쌓인 구신골 벼락바위층(반구대암각화)은 만 권의 역사책을 쌓은 듯했다. 더욱이 석양이 들 무렵이면 역사책은 유난히 미끈했다. 나는 벼락바위 역사책에서 우리 조상들을 봤다. 범불의 근원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랜 기원을 가진 고서적이었다. 그때 숲길을 걸어오는 인간들이 보였다. 역사책을 보러온 인간들은 훌륭한 표적이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본 두 인간도 보였다. 놀라운 침착성으로 나를 사로잡은 저 인간을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배성동 소설가


※ 이 글과 그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
구독신청

오늘의 울산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