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서와 지리지에 실린 동백 기사

기획/특집 / 정우규 (사)한국습지환경보전연합 이사장 겸 대표 / 2020-06-19 11:10:00
울산 동백

인간을 흔히 신과 동물의 중간 존재라고 한다. 인간이 스스로 동물보다 위대하다는 걸 말하기 위해 구분하는 것이다. 인간도 근본적인 면에서 동물과 마찬가지로 쾌식(快食), 쾌면(快眠), 쾌변(快便)과 생식(生殖)이 일생의 기본 삶이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서로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에 있어 글자와 기호, 부호를 사용해 앞 세대가 이룩한 지식과 기술을 다음 세대에 전달하고 다음 세대가 받아들여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켜 간다는 것이다. 


인류가 이룩한 많은 문명과 문화도 후대에서 선대가 이룩한 문명과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키지 못하면 쇠퇴하고 사라진다. 문명과 문화를 잘 지키고 보존하며 발전시킨 주역들은 조상들이 이룩한 성과를 계승하고 자기들이 한 단계 높은 문화로 재창출해서 후손들에게 전달해 온 사람들이다. 


동백꽃은 동양의 꽃 문화를 대표하는 꽃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다. 동백꽃을 사랑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세계동백협회를 만들었고 그 산하에 회원국이 40여 나라나 된다. 또 산업적으로 디자인하고 브랜드화했다. 대표적인 회사가 샤넬이다. 우리는 우리의 동백 문화를 계승하지 못했고 연구하지 않아 우리도 동백 문화가 있었고 세계의 동백 문화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필자가 그 동안 연구해온 바에 따르면 우리의 동백 문화는 그 시작이 가장 앞섰을 것이라 추정된다. 중국에 동백을 전해줘 당송시대 중국의 동백 시 문화를 발전시켰고, 일본에 착유 기술과 동백의 이름 ‘토바키’를 전했다.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꽃 동백 ‘오색팔중산춘’과 차 동백 ‘타조춘’의 원산지다. 우리는 세계의 동백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사실이 연구돼 증명만 하게 되면 세계에 자랑거리가 되고 여기에 신품종 육종, 동백원 조성, 상품 디자인 등 연구와 개발이 더해지면 경제적 활용 가치도 충분히 있다. 동백꽃 문화를 연구 개발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동백꽃의 역사, 문화, 생태 등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노력이 꼭 필요하다.

태종실록

태종공정대왕실록 제21권 태종 11년(1411) 신묘년 6월 9일에 ‘지울주사 이복례를 선주로 귀양 보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경상도 도관찰사가 보고하기를 “지울주사 이복례가 첩정(牒呈)하기를 좌도 염장관(鹽場官) 강유(强愉)가 과객인 전 감무(監務) 김양보(金陽普)를 청하여 기생 5명과 종 5명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섬(동백섬)으로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배와 함께 물에 빠졌다’고 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노(怒)하여 말하기를 “기생 5명이 함께 배를 탔다면 어찌하여 수령이 알지 못하고 강유만이 행락(行樂)하였겠느냐? 수령도 실상 참여하고 거짓 모르는 체한 것이니, 말을 꾸며대고 속인 그 죄는 더할 나위 없다”하고, 임금이 또 탄식하여 말하기를 “수령이 음탕한 까닭에 죄 없는 백성이 또 죽었으니, 강유와 김양보는 그들 스스로 자취(自取)한 것이거니와 수종(隨從)한 사람들이 불쌍하구나! 또 감사도 엄한 영(令)을 내리지 못하였으니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하였다. 좌우에서 아뢰기를 “신 등이 들은 바로는 그 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가 매우 많은데도 수령이 숨기고 보고한 것이라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 생각에도 거짓이라 짐작하였다. 이복례를 붙잡아 가쇄(枷鎖: 목에 칼을 씌우고 발목에 쇠사슬을 채움)하여 데려오고, 도망하지 못하도록 하라”하였다. 이복례가 이르자 순금사(巡禁司)에 내려 국문하니 이복례가 자백하기를 “김양보가 강유와 더불어 만호 정사빈(鄭思賓)을 섬으로 불러 놓고, 기생과 풍악으로 종일 술을 마셨는데, 저는 정사빈과 함께 어선을 타고 돌아왔고, 김양보와 강유는 기생과 종을 거느리고 작은 배를 타고 오다가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모두 10명이었습니다”하였다. 이복례의 죄가 율(律)에 정조(正條)가 없기 때문에 임금이 명하기를 “과오로 인명을 살상한 죄로 속(贖)하게 하라”하여 귀양 보냈다.

이 사건은 당시에 큰 사건이었다. 뒤에 안승과 김종직의 시에도 이 사건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애석함이 실려 있다.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1412) 3월 30일에 “개성 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 이문화(李文和)가 천엽동백(千葉冬柏)을 바치니 싸가지고 온 사람에게 저화(楮貨) 20장을 내려 주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에서 천엽동백은 겹꽃 동백을 말한다. 몇 겹인지는 확실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꽃을 겹꽃과 홑꽃으로 구분했다. 원예학에서는 국제적인 분류에 따라 겹꽃(duble petals)과 반겹꽃(semiduble petals)으로 나눈다. 일본에서는 반겹을 팔중(八重), 겹을 천중(千重)이라 적는다. 울산동백오색팔중산춘(五色八重散椿)에서 팔중을 여덟 겹으로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동백의 이름은 일본인들이 지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적 관습이나 기준에 따라서 번역해야 한다. 동백의 꽃 분류에서 팔중이란 꽃잎의 개수가 8개 이상이고 수술이 있고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꽃을 일컫는 말이다. 지금부터 600년 전에 겹동백이 있었다는 기록은 겹꽃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현재 재래종 동백에는 겹꽃이 알려지지 않았다. 멸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겹동백이 황해도 육지에서 발견됐다면 육지에서 가장 북쪽에서 발견된 기록이 된다. 현재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동백나무의 북한지는 옹진군 백령면 대청도다.
 

▲ 태종공정대왕실록 제21권 태종 11년(1411) 신묘년 6월 9일에 ‘지울주사 이복례를 선주로 귀양 보냈다’는 기사



단종실록

단종 2년(1453년) 7월 10일 승정원에 전지(傳旨)하기를 “전라도 방물인 동백기름은 지금부터 진상하지 말도록 하라”했다. 어린 왕이었지만 백성들의 고충을 들어주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수양 이유의 왕위 찬탈이 없었더라면 어떤 왕을 모실 수 있었을까. 수양은 수족 밖에 모르는 조폭 리더십이었다. 공신들을 봐주기 위해 세금과 병역을 면제해 준 것이 단초가 돼 양반은 조세와 병역을 면제 받았다.

세조실록

7권, 세조 3년(1457) 4월 16일에 “유수강이 영동을 방어하는 일에 대해 조목을 갖추어 상언하다”는 기사가 있다.

우산도(牛山島)와 무릉도(茂陵島) 두 섬에는 읍(邑)을 설치할 만하니, 그 물산(物産)의 풍부함과 재용(財用)의 넉넉함은 저목(楮木)·저상(苧桑)·대죽(大竹)·해죽(海竹)·어교목(魚膠木)·동백목(冬栢木)·백자목(栢子木)·이목(梨木)·시목(柹木)과 아골(鴉鶻)·흑색산구(黑色山鳩)·해의(海衣)·복어(鰒魚)·문어(文魚)·해달(海獺) 등의 물건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화곡(禾穀)의 생산이 다른 지방보다 10배나 된다. 동·서·남·북이 상거(相距)가 각각 50여 리(里)나 되니 백성이 거주할 수가 있다.

울릉도 동백나무 자생지는 현재 동해에서 최북단 자생지다.

연산실록

연산 6년(1499) 3월 1일에 “동백(冬柏) 5∼6 그루를 각기 화분에 담고 흙을 덮어 모두 조운선(漕運船)에 실어 보내라”, 연산 11년(1504) 4월 9일 “동백·장미에서 여느 화초에 이르기까지 모두 흙을 붙여서 바치게 하매, 당시 감사들이 견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종류마다 수십 주를 바치되 계속 날라 옮기니, 백성이 지쳐서 길에서 죽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중종실록

중종 4년(1509) 11월 23일에 “창고에 납입하는 지방의 짙은 황색의 유동기름과 동백기름은 모두 간절히 쓰는 것이 아니니 모두 줄이도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 11월 15일에 “강원도 강릉부(江陵府)에 날마다 이어서 장마가 지고 날씨가 따뜻하여 동백꽃이 피었다(乙巳/江原道 江陵府, 連日霪霖, 日氣和暖, 山茶花開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서 산다화는 동백을 이르는 중국 이름이다.

정조실록

정조실록 37권, 정조 17년(1793) 4월 29일에 ‘장연의 대청도 소청도에 백성을 모아 농사 짓게 하다’라는 기사가 수록돼 있다.

장연(長淵)의 대청도(大靑島)와 소청도(小靑島)에 백성들을 모집하여 농사 짓고 살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앞서 좌참찬 정민시가 아뢰기를 “서북의 폐사군 지역인 후주(厚州)의 서남쪽 섬들은 처음에 야인들이 들어와 살고 해적들이 침략해 와서 그 땅을 버려두었지만, 지금은 야인이나 해적의 걱정이 없어진 지 이미 수백 년이 …중략… 고려 때 조운흘(趙云仡)은 ‘대청과 소청 등의 섬은 모두 비옥한 땅과 고기 잡고 소금 굽는 이익이 있다’하였고 …중략… 소청도는 대청도 남쪽 뱃길로 30리쯤에 대청도와 마주하여 있습니다. 남북이 10여 리이고 동서가 5리인데 북쪽으로 백령진과의 거리는 60리이고 …중략… 나무들은 대체로 떡갈나무가 많고 동백(冬栢)과 춘백(春栢)이 십중칠팔이었습니다.”

좌참찬 정민시가 대청도와 소청도의 일반 상황을 임금님께 아뢰는 내용 중에 소청도의 나무들은 대체로 참나무가 많고 동백(冬栢)과 춘백(春栢)이 십중칠팔이었습니다”라고 했다. 필자도 2017년에 대청도를 답사했다. 동백나무의 키가 2~3m, 뿌리목둘레가 20~80cm다. 50여 년 전에는 48그루였는데 지금은 35그루다. 대청도 동백보다 굵다. 꽃은 4월말에서 늦게는 5월초에 핀다. 230년 전에 동백나무가 70~80%였다니 당시는 대단한 군락이었다. 대청도의 동백에 대한 언급은 없으나 두 섬이 배로 10분 남짓한 거리다. 약 60년 전의 기록에 의하면 뿌리목(줄기목)의 지름이 20㎝에 이르는 나무가 147그루나 있었다고 돼 있다. 지금은 그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지만 아늑한 계곡의 중간 쯤 남향의 작은 절벽 아래 철망으로 둘러친 안에서 지름 10cm 전후 굵기이고 키가 3~4m 정도 되는 100여 그루가 무더기로 나눠져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1937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문화재청에서는 1962년에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정조 당시에도 대청도에 동백나무가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령면 덕포리 백령중앙교회에도 동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해동역사

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에 “왜(倭)의 광인천황(光仁天皇) 보귀(寶龜) 원년(770, 문왕34)에 발해가 헌가대부(獻可大夫) 사빈소령(司賓少令) 개국남(開國男) 사도몽(史都蒙), …중략… 등 187인을 파견하여 사신으로 보내와서 왕비(王妃)의 상(喪)을 고하고 왜황이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왜황은 전계(展繼)를 보내 사도몽과 함께 발해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으며, 견(絹) 50필, 실 200꾸러미, 솜 300둔을 하사하였다. 사도몽이 더 주기를 요청하자, 또 다시 황금 작은 것 100냥, 수은 큰 것 100냥, 금칠(金漆) 1단지, 해석류유(海石榴油) 1단지,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 4관, 빈랑(檳榔) 10매를 주었으며, 왕비의 상에 견 20필, 명주(絁) 2필, 솜 200둔을 부의(賻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속일본기

속일본기에 천보 8년(宝亀8年: 777년 5월) 발해국사가 돌아갈 때 해석류(海石榴: つばき) 기름을 소망하여 기증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백기름은 남북국시대 당시 대진국(발해)에서 대단히 귀한 머릿기름이었으나 중국(당)과의 무역에서도 구하기 힘든 물품이었던 것 같고 생강나무 씨기름 등 대용 기름도 몰랐던 것 같다. 당시 동백기름은 머릿기름, 살갗 보호에 바르는 기름(스킨 오일), 가구 기름, 도검류의 녹 방지 기름, 식용과 약용 기름, 신불봉헌등(神佛封獻燈) 기름 등을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울산 태화강 이휴정 주변 장춘오

신증동국여지승람(이행 등, 1530)에 실린 권근(權近)의 대화루(현 태화루) 기문에 이르기를 “울산 고을은 동쪽과 남쪽으로 큰 바다에 접해 있고 …중략… 황룡연(黃龍淵)이라 한다. 그 북쪽에 돌 언덕을 깎은 듯이 벽처럼 섰으며, 물이 다시 남으로 구부러지고 동으로 도는 곳에 산이 높다랗게 있어 물 남쪽에 버티고 섰는데, 이름 있는 꽃과 이상한 풀, 해죽(海竹)과 산다(山茶)가 겨울에도 무성하여 이를 장춘오(藏春塢)라고 한다. 신라 때에 비로소 절을 이 북쪽 언덕에 세우고 대화(大和)라 하였는데”라는 기록이 있다.

울산 동백섬

울산 동백섬이 최초로 수록된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변계량 등, 1454)다. 이 지리지에는 “군 남쪽에 동백섬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76년 뒤 신증동국여지승람(이행 등, 1530)에는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동백이 섬에 가득하여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후 발간된 학성지(권상일, 1749), 울산부여지도신편읍지(울산부, 1786), 대동지지(김정호, 1864) 등이 그대로 따르고 있다. 조선시대 발간된 지리지에 수록된 유일한 동백섬이다.

 

▲ 울산 동백섬


부산 동백 자생지(해운대)

부산 해운대 동백이 최초로 수록된 지리지는 세종실록지리지(변계량 등, 1454)다. 이 지리지에는 해운대가 “동래현 동쪽 바닷가에 있으니, 최치원이 놀던 곳이다. 정자 터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동백나무와 두충나무(사철나무를 잘못 표기)가 그 곁에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는 기록이 있다. 76년 뒤 신증동국여지승람(이행 등, 1530)에는 “해운대 현의 동쪽 18리에 있다. 산의 절벽이 바다 속에 빠져 있어 그 형상이 누에의 머리 같으며, 그 위에는 온통 동백나무, 두충나무 그리고 소나무, 전나무 등으로 덮여 있어 싱싱하고 푸르러 사철 한결 같다. 이른 봄철이면 동백꽃 잎이 땅에 쌓여 노는 사람들의 발굽에 채이고 밟히는 것이 3,4치나 되며, 남쪽으로 대마도가 아주 가깝게 바라보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해운대 동백섬을 섬이라 기술하지 않은 것은 당시에도 사구로 바닷가에 연결돼 있었던 것 같다.

영암 동백소

신증동국여지승람(이행 등, 1530)에는 ‘영암 동쪽 15리 지점에 동백소(冬柏所)가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행정 주소로 영암군 덕진면 백계리다. 동백소는 일본에 천자문을 전한 왕인 박사가 출발한 마을이라고도 한다. 이웃한 선암마을은 통일신라 해상왕 장보고(본명 궁복)와 그의 평생 동지인 정년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동백나무가 많은 마을이다. 기타 순천도호부에 “동백원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가장현에 “동백포 현의 동쪽 9리에 있다”, 비인현에 “동백정이 도둔관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정우규 (사)한국습지환경보전연합 이사장 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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