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자리의 팽주(烹主)

문화 / 김상천 시인 / 2020-06-25 11:12:28
다향만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깨진 데서 오는 현대인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마르틴 부버는 ‘진정한 만남’을 제시했다. 대중사회적 상황과 평준화의 진행 속에서 아무런 내적 연관도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의 위기를 인격으로서 공존하는 ‘너와 나’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길을 가든 음식을 먹고 놀이를 하든 누구와 함께 하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된다. 그래서 우연한 스침까지도 소중한 만남으로 축복해달라고 기도하는 나는 소통의 공간으로 찻자리만한 것이 없다고 늘 말해왔다. 


찻자리에는 팽주(烹主)가 있다. 찻자리에서 차를 끓여 손님에게 내어 놓는 사람을 우리는 팽주라 부른다. 팽주는 그 날 찻자리의 주인인 샘이다. 그러므로 팽주가 누구인가에 따라 찻자리의 대화도 다르고 차의 맛과 분위기도 다르다. 대부분의 음식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우리의 전통 음식 문화라 할 수 있지만 차는 다르다. 차는 누가 팽주가 되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스승이나 윗어른이 팽주가 돼서 차를 내리는 경우가 더 많이 있다. 사람들은 스승이 내리는 찻자리에서 스승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가 찻잔 속에 녹아 은은한 향과 함께 마음속 깊숙히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되고 그렇게 차를 나누다 보면 스승의 인품과 생각의 깊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지인들과 함께 경주 남산을 자주 오른다. 얼마 전 등산 후 돌아오는 길에 전에 보이지 않던 찻집을 발견하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성큼 들어갔다. 마당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는 주변 분위기가 영업을 주 목적으로 하는 찻집은 아닌 것 같았다. 옛 사랑채를 소박하게 꾸며 차방으로 쓰고 있었다. 인사를 간단히 나눈 주인이 바로 팽주가 돼 우리 앞에 앉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좀 젊은 여성이 팽주(烹主)가 돼 앞에 앉아 있어 조심스러웠지만 벽에 걸린 시(詩)를 읽는 가운데 경주가 낳은 위대한 향토사학자 고창 윤경열 선생의 존함이 있어 화제(話題)가 되니 근방 친근한 대화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나는 습관처럼 팽주의 모습과 차를 달이는 행동을 조용히 살피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주의를 기울였다. 감물 들인 개량 한복을 곱게 입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차를 따르는 모습이 너무나 담백하고 단아해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되는데 가냘픈 몸매까지 더해져 청순가련한 가을 날 코스모스 이미지를 느끼게 했다. 차를 마시면서 팽주의 겸손함을 보았고 훗날 다시 찾을 기약을 마음속 스스로 다짐한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고 대문 앞 개울가에 코스모스가 피면 다시 와서 저 여인이 전해 주는 차 한 잔 맘 곱게 받고 싶다.


사람이 살면서 비록 스쳐 지나가는 만남 속에서라도 의미가 되고, 그대가 되고, 추억이 된다면 행복이라 하겠다. 차 한 잔 속에 팽주(烹主)의 인격이 녹아있고 생각과 세계가 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팽주의 자세는 먼저 찻자리의 분위기를 편안히 이끌어가야 한다. 팽주는 그 날 찻자리의 분위기 메이커인 것이다. 좋은 차를 앞에 두고서 때로는 팽주로 인해 씁쓰레함을 지울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손님을 대해야 하며 차를 설명할 수 있는 기본 소양을 갖고 있어야 하겠다. 이왕이면 막힘이 없도록 대화를 이끌고 소통의 자리를 아름답게 가꿔 가면 찻자리의 금상첨화(錦上添花)가 아닌가.


살아오면서 수많은 찻자리에 앉아 봤지만 기억에 남아 기념하고픈 팽주의 모습은 그리 많지 않다. 팽주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생애를 송두리째 흔들어 깨우기도 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으로 남아 힘들게 하기도 한다. 차를 마시면 그냥 차만 먹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얼굴을 살피며 대화하는 가운데서 차향(茶香)과 인향(人香)이 어우러져 찻자리의 깊이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혼자일 때면 편하게 차를 마시지만 손님을 앞에 두고 팽주가 될 때는 많은 부담으로 긴장하게 된다. 절로 맑고 향기로운 자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옷깃을 여미고 정성을 다하고자 한다. ‘다향만리(茶香萬里)’, ‘인향만리(人香萬里)’.


김상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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