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매듭 풀기

문화 / 이태영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회원 / 2020-06-25 11:13:06
서평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성실한 선생인 그레고리우스가 잘 다니던 스위스의 학교를 어느 날 갑자기 무단이탈하고 길도 먼 리스본으로 훌쩍 떠나는 것으로 시작되는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요즘 다소 단조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나를 사이다처럼 시원하게 매료시켰다. 한 번씩 생각해 볼 수는 있어도 실행은 극히 어려운 것, 그것은 무단이탈이다. 폴 고갱이 타히티로 떠날 때의 예술에 대한 정열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앞뒤 생각 없이 순간적으로 저질렀다. 그를 묘사하자면 정시 출근 정시 퇴근, 금연, 그리고 그가 전공하는 문헌학에 대한 애착과 깊은 지식, 취미는 수준급 실력인 체스, 외모에는 도통 신경 쓰지 않는 후줄근한 옷차림, 검은 뿔테의 도수 높은 안경 등이다. 

 


‘극적인 순간만이 인생에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도 있다. 삶에 새로운 빛을 부여하는 경험은 그렇게 소리 없이 찾아온다.’ 이렇게 아주 사소한 것에서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저자를 찾아가는 그의 리스본행은 실은 ‘자기 찾기’ 여행이었다.


그러나 그 여행은 과거의 매듭 풀기 여행이었다. 그가 만난 아마데우의 절친, 혁명 동지들, 친누이, 그의 이상적인 여자 등 모두가 아마데우와 생활했던 과거의 한 시점에서 마음 속 깊은 매듭이 서로 얽혀있었다. 서로 각자 이유는 다르지만 그들이 아마데우한테 느끼는 과도한 마음의 빚이 그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다. 문제는 해결되기 위해 있는 것이고 매듭 역시 풀리기 위해 있는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의 열쇠 같은 등장으로 아마데우라는 자물쇠로 꼭꼭 잠겨 있었던 그들의 과거의 매듭이 마법처럼 풀어진다. 오빠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아마데우의 여동생 아드리아나가 현재 시점으로 복귀하는 변화는 극적이다. 


숙명적 삶을 긍정하고 현재의 삶이 약동하는 엘랑바이탈(Elan vital)이 되기 위해서는 과거의 매듭을 풀어내야 한다. 지금까지의 삶이 너무 평범해서 싫고 바뀌기를 원한다면? 제2의 인생을 살고 싶다면? 실수라도 좋다. 마음이 끌리는 게 있다면 일단 시작하고 보자. 리스본 여행을 끝내고 그레고리우스가 그의 집이 있는 베른으로 귀가했을 때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불쑥 떠났던 여행이 그를 바꿔 놓았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생활 성실형으로서 또한 이성적 판단으로서 우리를 얼마나 많이 자리매김했던가?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었지만 감성이나 우연에서 나오는 이전의 삶과 결을 달리하는 도전과 경험으로 우리의 인생에 또 다른 색채를 입혀보면 어떨까?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라고 그레고리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인용한다.


과거의 매듭을 풀고 영혼이 떨리는 삶을 만들어 갈 주체는 자신 본인이다. 내 프레임을 깨기 위해서는 내가 망치를 들고 두드려야 한다. 영화에서는 기차역을 떠나려 하는 그레고리우스한테 여의사 마리아나 에사가 리스본에 남을 것을 요청한다. “Why don’t you just stay?(그냥 머무르면 안 되나요?)” 그레고리우스의 영혼의 떨림이 느껴진다.


이태영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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