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텍스트)의 힘은 어디까지

문화 / 박기눙 소설가 / 2020-04-02 11:50:09
미디어 프리즘 눙길

미디어 안에 숨은 여러 빛깔을 소설가 박기눙의 눈길(눙길)로 훑는다.

문자로 여는 세상

수많은 인간의 활동을 기억하는 일은 힘들다. 다만 기록을 통해 비로소 구현된다. 오래전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생각, 행태를 엿보는 데 그 어떤 것보다 값어치가 높은 것이 기록이다. 기록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제쳐두고라도 기록이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는 인간과 짐승의 차이만큼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인간의 사고를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일에 문자는 대단한 역할을 한다. 문자를 사용하고 문자를 이용해서 텍스트를 만드는 과정은 인류사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과정이다. 문자를 만든 이래 인간의 활동은 많은 영역으로 확대됐을 것이다. 문자의 기록을 보고 반복이 가능했고, 학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물질화하는 과정은 문학의 영역이다. 시, 소설, 연극을 망라하는 문학에서 문자는 절대 우위를 차지한다. 문학의 영역을 벗어난 영화, 드라마, 웹툰 따위에서도 문자는 필수 불가결하다.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데도 문자 텍스트가 우선인 경우가 허다하다. 영상 미디어 콘텐츠를 만드는 과정에서 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뮤지컬에 나오는 음악만큼이나 기본이다. 영상 미디어에서 문자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영상 콘텐츠를 생산하는 과정(구상과 계획)에서 문자를 배제하기란 힘들 것이다. 예를 들어 콘티 작업은 화면 구성 미리보기의 구현이다. 콘티에서 그림은 문자보다 더 많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도 문자가 없는, 문자 주석이 없는 콘티는 미완성인 형태로 남는다. 문자와 그림의 협업으로 콘티는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림과 문자, 둘의 속성을 적절하게 섞어 만든 콘티는 함께 작업할 이들의 사고를 한 곳으로 모으는 구심체 역할을 할 것이다. 콘티를 바탕으로 찍은 영화는 자막을 달고 여러 나라로 팔려나간다. 자막은 영화 속 오리지널 언어보다 더 신경 쓰이는 존재일지 모른다. 문자, 자막은 미디어 콘텐츠에서 점점 중요한 표현의 영역이 됐다.

미디어 플랫폼에서 문자는 살아남는다

요즘 전 세계를 상대로 제공하는 미디어 플랫폼이 많다. 그런 미디어 플랫폼 콘텐츠를 소비하는 이들의 언어는 천차만별이다. 수많은 언어 중에서 영어는 단연 사용 빈도가 잦은 언어일 것이다. 자국의 언어를 버리고 영어를 사용해서 만든 콘텐츠가 팔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막의 힘, 곧 문자의 힘이다.


영상 미디어 속에서도 문자는 말보다 힘이 세다. 자막이 그 한 예다. 언어를 문자화한 자막은 화면을 가득 채운 영상보다 더 빨리 읽힌다. 외국어로 만든 미디어를 소비할 때는 더 그렇다. 이해 가능한 언어, 문자를 읽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 자막으로 제공되는 문자를 뺀다면 미디어를 소비하는 일은 소수에 그칠 것이다. 영상 미디어의 속성 중 하나인 대중성, 보편성, 지속성을 담보하는 것은 어쩌면 문자의 힘일지도 모른다. 


미디어 콘텐츠의 언어 제공은 콘텐츠를 만든 국가의 언어뿐만 아니다. 영어를 비롯한 여러 개의 언어가 붙는다.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외에 여러 나라 언어를 제공함으로써 콘텐츠는 여러 개의 생산물로 분화한다. 애니메이션의 경우에 그 선택이 더욱더 폭넓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성우가 더빙한 콘텐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외국어를 선택해서 보는 식이다. 콘텐츠를 구매자의 언어 취향에 맞춰 선택하는 것이다. 각 언어가 갖는 고유의 발음, 억양은 사라지고 각자의 취향에 맞는 언어가 남는다. 인물은 동양인이고 분명 배경도 동양인데 더빙은 지리적 배경과 전혀 다른 서구의 언어가 나오는 식이다. 마치 우리말 더빙이 된 외화를 볼 때와 같다. 언어인 말은 미디어 콘텐츠 안에서 오리지널의 특성을 담보 받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 소리와 자막은 말과는 전혀 다른 영역이다.


자국의 콘텐츠를 보더라도 장면을 설명하는 자막과 함께 보는 것이 가능하다. 배우의 발음이나 눈에 띄지 않는 극적인 장치까지도 자막에서 훤히 드러난다. 극 중 배우의 이름을 자막을 통해 확인하고 배경음, 효과음 따위를 설명하는 자막을 읽으며 여러 가지 드라마 장치를 알아채는 경우도 생긴다. 어떤 콘텐츠의 설명자막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멀리서 개가 짖는 배경 장면의 설명은 항상 ‘개가 왈왈 짖는다’로 표현하는 식이다. 소리를 문자로 표현하는 방법이 많음에도 한 가지 표현을 고집한다. 화면을 표현하는 문자가 정확하게 들어맞을 때 소비자는 그 영상 콘텐츠를 더 신뢰하게 될 것이다.

문자의 미래는?

뮤직비디오 속에서 아이돌 가수들이 노래한다. 화면은 그들의 춤 동작으로 가득하다. 셋 혹은 일곱, 많게는 열이 넘는 아이돌 멤버의 동작은 쉼 없이 화면을 흔든다. 현란한 카메라 워킹, 그런데도 한쪽에 보이는 가사가 먼저 눈에 띈다. 가사를 무시하고 영상만 보기란 역시 쉽지 않다. 아는 노래, 아는 가수일지라도 자꾸만 문자에 눈길이 간다. 안무 동작보다 센 것이 문자(텍스트)임을 느끼는 순간이다. 멜로디에 실린 가사의 모호함은 문자 자막으로 사라진다.


인간이 쓰는 문자는 물리적, 지리적 환경과 역량에 따라 다르지만 그 기능은 비슷한 면이 많다. 고유의 문자를 쓰는 사람들끼리 문화를 공유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자의 우위를 따지는 일은 문화의 우위를 다투는 것과는 결이 다르지만, 다수의 사람이 쓰는 언어는 이미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의 문화를 빼앗고 변질시키는 주범이 됐다. 각국의 언어로 해석하지 못하는 용어가 점점 늘어나고, 외국어의 뉘앙스를 그대로 흉내 내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어떤 나라든 영어로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주저함이 없다. 이것은 마치 소비자를 위한 배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퇴행이다. 지역 드라마에서 사투리를 거세한 것과 같은 형국이다.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이라 그 언어를 쓰지 않으면 생각의 체계도 변하게 마련이다. 우리말에서 영어식 표현(수동태나 술어가 전부 ‘있다’로 끝나는 식의 남발 따위)이 점점 눈에 띄는 것은 영상 콘텐츠 속 표현을 그대로 답습해서 생긴 탓도 크다.


표현은 그대로 두고 뜻이 통하는 알맞은 낱말을 찾는 일은 녹록치 않은 작업이다. 말이 기록을 당하지 못하듯 영상 속 문자는 영상에 밀려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미 명성을 얻은 영상 콘텐츠의 자막, 문자는 단순한 번역이 아닌 문학의 영역처럼 보인다. 문자(자막)의 표현이 예술적으로 다양할수록 영상 미디어 콘텐츠는 점점 더 수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을 것이다.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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