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삶-<소년이 온다>를 읽고

기획/특집 / 정윤돈 / 2020-05-20 11:58:27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내가 만난 5.18

5.18민중항쟁40주년울산행사위원회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내가 만난 5.18'을 주제로 울산시민들의 글을 모았다. 시민들이 보내온 글 가운데 몇 편을 추려 지면에 싣는다. <편집자 주>

 

▲ 5월 18일 남구 삼산동 롯데백화점 앞 마당에서 5.18 40주년 울산기념식이 열렸다. ⓒ이종호 기자



친구, 형, 언니와 같은 따뜻한 말이 제압봉, 총알과 같은 차가움에 닿아 찢어진다. 소설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마치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생생하게, 심지어 그 사람이 되어 직접 말해준다. 중학생이었던 동호는 계엄군이 쏜 총알에 맞아 쓰러진 친구를 찾기 위해 도청에 가고, 은숙과 선주는 비참하게 죽은 이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시체를 닦는다. 그들의 마음은 단순하다. 지금껏 살아온 대로 친구를 챙기고 이웃을 돕는 마음. 그 마음을 이해하는 데에 ‘비상계엄’, ‘불순분자’와 같이 어려운 말은 알 필요도, 의미도 없었다.


죽음을 빗맞은 이들이 살아가는 고통 또한 그려진다. 군인에게 끌려가 치욕스러운 고문을 받은 이들의 트라우마, 사태가 일단락됐음에도 여전히 쫓기고 구타당하고 검열되는 삶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죽지 않고 살아있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고통받는다.


“살아남았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본문 135쪽


그들은 아직 살아있고, 살아서 이 소설을 썼다. ‘우리를 희생자라고 부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보아야 한다. 검열된 대사를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껌뻑이는 이들의 연극을 보는 눈으로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그것이 그들을 ‘고귀’하게 할 것이다.


학창 시절, 나는 역사 시간이 제일 재미 없었다. 역사 속에서 사람은 사람을 쉽게 죽였다. 역사 속에서 죽임은 빈번하고 일상적인 것이었는데, 평생 죽임은커녕 죽음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역사 선생님은 역사 속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의 배경과 사고방식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은 마치 사람을 죽이는 것이 일상적인 사고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역사 속의 슬픔은 내가 아는 슬픔과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고, 나는 그 슬픔을 온전히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에게 역사는 그저 일어난 사건을 시간 순서대로 외우는 과목에 지나지 않았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도 그랬다. 박정희를 암살하고 정권을 잡은 신군부 세력이 내린 계엄령에 반발해 광주 시민이 봉기했고, 이를 군인이 무력으로 진압한 유혈 사태. 민주화, 운동, 유신 체제, 신군부 세력, 쿠데타, 비상계엄과 같은 말들처럼 쉽게 와닿지 않는 한자어들은 딱딱했기에, 나는 이 말들을 씹지도 않은 채 삼켜버렸다. 그 맛을 모른 채 살다가, 이제서야 반추해 곱씹는다.


동호, 정대는 중학생, 은숙은 고등학생. 진수는 대학생, 선주는 직장인.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있는 나도 이들의 나이를 살아봤다. 생각해보면, 이들의 삶은 나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에 다니는 학생, 번듯한 회사 사무실에 출근해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는 직장인. 시덥잖은 얘기를 나누는 있는 친구. 자동차도 보급돼 택시도 다닐 만큼 이기가 갖춰진 사회, 학문이나 음악과 같은 정신적 가치도 존중되는 사회. 가족들 배 안 곯고 따뜻하게 자는 것이 평화라면 평화인 삶. 피를 볼 일이 없었고 죽음을 생각해본 적도 없다. 이런 일상 속에서 피와 죽음이라니. 동호도 나처럼 바늘로 손끝 따는 것도 아프고 무서워 도망 다녔을 것을 상상하면 가슴이 아리다. 진심으로 아리다.


나는 운동을 글로 배웠다. 운동은 뭐지? 뜻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모여 소리를 높이는 것. 왜 하지? 뜻을 공유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만 허공에 대고 소리 지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소리를 지르면, 그것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사람들이 주목하니까. 주목을 얻으면 사람이 모이고 힘이 실리니까. 아하, 그렇구나. 나는 자발적으로 운동(캠페인, 시위)에 참여해본 적이 없다. 내 뜻을 남에게 떳떳하게 말할 자신이 없다. 옳고 그름을 판단해 목소리를 낼 만큼 어떤 사안에 대해 나는 아직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는다. 운동을 글로 배운 나는 그 생각 때문에 평생 운동을 하지 못한다.


운동을 몸으로 배운 사람들은 달랐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운동을 배운 것이 아니라 그저 운동을 한 것이고 그들 자체가 운동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운동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그냥 순리대로 살았을 뿐이다. 순리는 체화된 것이고, 체화된 것은 생각할 겨를 없이도 자동 반사로 튀어나온다. 그들의 생각이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싶다.


우리 집에 불이 났다고 생각하면 알 수 있을까. 다른 가족들은 다 잠들어 있는 새벽, 집 한 켠에서 불이 나 집이 타고 있다면 가장 먼저 가족들을 깨우겠지. 그리고 집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겠지. 119에 신고하겠지. 여력이 있다면 온 집이 불에 다 타버리기 전에 불길을 제압하려 하겠지. 물을 퍼다 붓든 무슨 짓이든 다 하겠지. 불길이 이미 커져 있다면 쉽사리 잡히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겠지. 불을 끄겠다고 분주히 물을 퍼다 나르느라 체력이 바닥이 나서 숨조차 쉬기 힘들어도, 두 손 놓고 우리 집이 불타는 걸 보고 있을 수는 없겠지. 나는 단순히 태어나서 자란 집을 지키기 위해 이토록 불을 끄려 하는 게 아닐 거야. 다시 집을 일으켜 세우는 작업이 두려워서도 아닐 거야. 우리 집이, 멀쩡한 집이 타게 두는 걸 막지 않는 게 싫어서일 거야. 게다가, 만약 누군가가 우리 집에 불을 질러 몽땅 태우려고 하는 거라면, 나는 더 악을 쓰고 집을 지켜낼 거야. 나는 끝까지 집을 지키기 위해 불과 싸울 것이다. 119 소방차가 도착해 모든 불을 꺼주고, 112 경찰차가 와서 우리 집에 불을 지른 방화범을 끝까지 쫓아가 잡아줄 때까지.


불타는 집을 앞에 두고, 나에게 이유, 당위성, 판단, 숙고가 얼마나 중요할까. 도청에서 연행된 청년이 말하는 ‘양심’, 성희 언니가 습관처럼 말하는 ‘고귀함’에 대해 생각한다. 뿌리처럼 땅속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것. 꺾이고 베어져도, 몇 번이고 다시 줄기를 세우고 잎을 틔우는 것.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수 없는 마지막 이유. 뒷꿈치에 양심이 채일 때, 우리는 고귀해진다.


책을 덮자마자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찾아보았다. 설명문의 문장은 여전히 딱딱했지만, 조금 동적으로 읽히기 시작했다. ‘투쟁’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뜨거웠고, ‘발포’라는 말에 숨이 턱 막혔다. ‘5월 21일’이라는 날짜를 보면 도청에 숨어 총을 들고 경계하고 있는 진수가 떠오르기도 했다. 설명문은 이 운동의 의의로 끝이 난다. 그래서 한강이 책을 썼나 보다. 끝나지 않은 삶들을 이어 쓰기 위해.


이 책은 손 닿는 곳에 놓여 있다. 안개꽃 위에 누인 한 소년의 관처럼 살포시 놓여 있다. 그 뚜껑을 열어 보길 바란다. 열고 들여다보길 바란다.


정윤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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