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형을 선고받은 해월

기획/특집 / 성강현 전문/문학박사/동의대 겸임교수 / 2019-11-13 15:01:25
해월 최시형 평전

 

 

▲해월 최시형의 판결선언서(일부). 1898년 5월 29일(양 7월 18일)에 고등재판소에서 해월과 황만기, 박윤대, 송일회 등 4명에 대한 판결이 내려졌다. 해월은 교수형, 나머지 3명은 태형과 징역형에 처해졌다. 판결문에 ×표가 그어진 것은 광무(光武) 11년(1907년) 7월 26일에 법부(法部)의 훈령(訓令)을 받아 원본(原本)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해월의 건강 악화로 신속한 재판

 

해월이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후 4월 20일 시작된 재판은 빠르게 진행됐다. 고등재판소에서는 해월이 질병 때문에 쇠약해지자 감옥에서 병사(病死)할 것을 염려했다. 고등재판소에서는 중죄인인 해월이 감옥에서 병사하면 나라의 체면과 법의 위엄을 해친다고 해서 재판이 진행된 지 한 달만인 5월 말에 신속하게 재판을 종결했다.

 

1898년 5월 29일(양 7월 18일) 고등재판소에서는 10여 차례의 심문 결과 ‘최시형 등 공소질품서(公訴質稟書)’와 ‘최시형 등 공소장’을 작성해 재판관 주석면(朱錫冕)의 이름으로 법무대신인 조병직(趙秉稷)에게 제출했다. 주석면은 ‘공소질품서’에서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의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 이른바 좌도난정률(左道亂正律)에 의해 해월을 교형(絞刑)으로 다스리고, 나머지 3명은 태형(笞刑)에 처해 달라는 내용을 질품서에 담았다. 그러면서 송일회와 박윤대는 해월의 체포에 공을 세워 감형을 해 달라는 내용도 포함시켰다. 법무대신 조병직은 공소질품서와 공소장을 바탕으로 원안대로 판결을 내렸다.

해월의 판결선고서

 

5월 29일 판결선고서에는 해월과 황만기, 박윤대, 송일회 등 4명의 판결 내용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판결문 대부분이 해월에 관한 내용이고, 나머지 3명은 해월과 같이 체포됐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이 재판과정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판결선고서의 전문을 싣는다. 

 

 

판결선고서(判決宣告書)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평민. 피고 최시형(崔時亨). 나이 72세.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평민. 피고 황만기(黃萬己). 나이 29세.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평민. 피고 박윤대(朴允大). 나이 53세.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평민. 피고 송일회(宋一會). 나이 33세.

 

위의 피고 최시형, 황만기, 박윤대, 송일회의 사건을 검사(檢事)의 공소에 따라 이것을 심리하였다. 피고 최시형은 병인년(丙寅年, 1866년)에 간성(杆城)에 사는 필묵(筆墨) 상인인 박춘만(朴春萬)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동학(東學)을 전수 받아 선도(善道)로 병을 치료하고 주문(呪文)으로 신(神)을 내리게 한다고 하며 여러 군(郡)과 도(道)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라는 13자(字)의 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는 8자 강신문(降神文) 및 동학원문(東學原文)의 제1편 포덕문(布德文), 제2편 동학론(東學論), 제3편 수덕문(修德文), 제4편 불연기연문(不然其然文)과 궁궁을을(弓弓乙乙)의 부도(符圖)로 인민(人民)을 선동하고 무리를 규합하였다. 또한, 죄를 짓고 사형을 당한 최제우(崔濟愚)의 “만년지상화천타(萬年枝上花千朶, 만 년 묵은 가지 위에 꽃이 피어 천 떨기요) 사해운중월일감(四海雲中月一鑑, 사해의 구름 가운데 달 솟으니 한 개의 거울일세)”이라는 시구를 사모하고, 법형법제(法兄法弟)의 실심(實心)과 경신(敬信)을 따라 법헌(法軒)의 호를 부르며 해월(海月)의 인장(印章)을 새겨 교장(敎長), 교수(敎授), 집강(執綱), 도집(都執),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의 두목(頭目)을 각 지방에 임명하였다. 또한 포(包)와 장(帳, 회소)을 설치하여 무리를 모았는데 1000만 명에 이르렀다. 

 

법에 따라 죽은 최제우를 신원(伸寃)한다고 하여 지난 계사년(癸巳年, 1893년)에 신도 몇천 명으로 대궐에 나아가서 상소를 올렸다가 바로 해산을 하였고, 보은(報恩)의 장내(帳內)에 많은 무리를 모았을 때 순무사(巡撫使)의 선유(宣諭) 때문에 각자 해산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894년) 봄에 이르러 피고의 도당(徒黨)인 전봉준(全琫準)과 손화중(孫化中) 등이 고부(古阜) 지방에서 같은 패를 불러 모아 기세를 타고 일어나서 관리를 해치며 성(城)과 진(鎭)을 함락시켜 양호(兩湖)의 땅이 썩어 문드러져 불안한 지경에 이르렀다. 피고가 이때 호응하여 지휘한 게 없다고 하지만 난리의 단계와 재앙의 근원을 살펴보면 피고가 주문(呪文)과 부적(符籍)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킨 데서 연유하였다. 

 

피고 황만기(黃萬己)는 지난 갑오년(甲午年) 5월에 동도(東徒) 임학선(林學善)의 협박을 받아 입도(入道)하여 바로 귀화하였다가 지난해 7월에 다시 임학선의 말을 듣고 도(道)를 섬기는 처지에 대종선생(大宗先生, 교조를 의미), 최시형을 의리상 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여 도망 중인 최시형을 방문하고 생선을 보내주었다. 

 

피고 송일회(宋一會)는 갑오년(甲午年) 4월에 동학에 들어가서 최시형이 청산군(靑山郡) 지방에 있을 때 1차례 찾아뵈었고, 올해 1월에 친한 동도 박윤대(朴允大)에게서 최시형이 이천군(利川郡)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옥천(沃川)사람 박가(朴哥)에게 말을 했다가 경무청(警務廳) 관리에게 체포되어 박윤대와 함께 길잡이가 되어 원주지방에 먼저 가서 최시형을 포획하였다. 

 

피고 박윤대(朴允大)는 동학에 들어가 최시형의 사위 김치구(金致九)의 집에서 고용(雇傭)살이를 하다가 경무청 관리에게 잡혀 송일회와 함께 길잡이가 되어 원주지방에서 최시형을 붙잡고 뒤에 이 때문에 풀려나서 돌아오는 길에 친한 동도 박치경(朴致景)을 만나 그의 부탁을 받고 엽전 20냥을 가지고 서울에 먼저 와서 최시형의 식비를 도우려고 경무청에 왔다가 체포되었다. 

 

그 사실은 피고 등이 자백한 진공(陳供)에 증거가 분명하기 때문에 이것을 법에 비춰 피고 최시형은 대명률(大明律) 제사편(祭祀編)의 금지사무사술조(禁止師巫邪術條)에, “잘못된 도에 호응하여 정도(正道)를 어지럽히고 또는 도상(圖象)을 숨기며 향을 태우고 사람들을 모아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해산하면서 겉으로는 선한 일을 수행하나 인민을 선동해서 우두머리가 된 자”의 형률로 교형(絞刑, 교수형)에 처한다. 

 

피고 황만기는 같은 편(編)의 같은 조(條)에, “종범(從犯)이 된 자”의 형률로 태형(笞刑) 100대에 종신(終身) 징역형에 처하고, 피고 송일회는 같은 편의 조에, “종범이 된 자”의 형률로 태형 100대에 종신 징역형에 처하나 피고 최시형을 잡을 때 길잡이를 한 공로가 없지 않아 본래 형률에서 2등급을 감해 태형 100대에 10년의 징역형에 처한다. 

 

피고 박윤대는 같은 편의 같은 조에, “종범이 된 자”의 형률로 태형 100대에 종신 징역형에 처할만하나 최시형을 잡을 때 길잡이를 한 공로가 없지 않아 송일회와 똑같이 2등급을 감해야 하지만 최시형이 갇혀 있을 때 식비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1등급을 감하여 태형 100대에 15년 징역형에 처한다. 

 

광무(光武) 2년(1898년) 7월 18일에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검사(檢事) 윤성보(尹性普)와 태명식(太明軾) 및 검사시보(檢事試補) 김낙헌(金洛憲)이 입회(立會), 참관하였다.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재판장(裁判長) 조병직(趙秉稷)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판사(判事) 주석면(朱錫冕)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판사(判事) 조병갑(趙秉甲)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예비판사(豫備判事) 권재운(權在運)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예비판사(豫備判事) 김택(金澤) 

 고등재판소(高等裁判所) 주사(主事) 김하건(金夏鍵)

 

 

고부 군수로 포학한 학정을 일삼아 동학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조병갑의 이름이 해월의 판결선고서에 등장한다는 것은 당시 조선 정부가 소수의 인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병갑은 법무대신 조병식과 한집안이었다. 아무리 중죄를 지어도 잠깐 귀양을 갔다가 복귀한 조병갑의 처세는 혀를 내두르게 한다. 

 

위의 판결선고서에서 해월이 동학에 들어온 시기를 1866년, 도를 전해준 인물로 강원도 간성의 박춘만이라고 잘못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해월의 재판에서 사실관계의 확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해월은 1861년 수운으로부터 직접 동학에 입도했다. 그리고 동학도의 인원수를 1000만 명이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사실과 다르다. 이렇게 동학도의 수를 부풀린 것은 해월을 중죄인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해월은 심문에서 자신이 직접 동학혁명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말했고, 조정에서도 해월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동학혁명을 일으킨 전봉준과 손화중이 해월의 수하로 지도를 받았고, 동학도를 모아 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에 해월이 근원적인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해월의 체포에 협조해 송일회와 박윤대는 감형했다. 다만 박윤대는 해월이 옥중에 있을 때 식비를 지원해주었기 때문에 송일회보다 감형이 줄어들었다. 박윤대는 자신이 해월의 체포에 일조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껴 옥중의 해월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해월 최시형의 가족. 앞줄 가운데가 해월의 부인 손씨. 사진 왼쪽의 사각형이 해월의 아들인 최동희(사진 뒷줄의 학생복), 오른쪽 사각형이 최동호(사진 앞줄 오른쪽에 아이)다. <신인간> 통권 제11호(1927.3)에 실린 사진이다. 

 

▲경주 황오리. 해월이 태어난 경주 황오리 모습이다. <신인간>통권제11호(1927.3)에 해월의 가족 사진과 같이 실려 있다. 

성강현 문학박사, 동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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