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 전국을 돌며 항일혁명 동지들을 규합하다

기획/특집 / 배문석 / 2021-06-02 00:00:24
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 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8)

여의도비행장은 1916년부터 간이비행장으로 이용하다 1927년 ‘항공법’을 시행하면서 울산 삼산벌에 신축되는 비행장과 함께 정식비행장으로 정비됐다. 1928년 12월 울산비행장 개항식에 이어 1929년 4월 후쿠오카에서 울산을 거쳐 여의도에서 다시 요동반도 끝의 다렌으로 연결되는 국제 정기노선이 열렸다.


1937년 7월 18일, 이관술과 이순금이 재회한 곳이 바로 여의도비행장 인근이었다. 두 사람이 오랜만에 오누이를 넘어 항일혁명운동의 동지로 서로를 각인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 1946.4.19 <현대일보> 이관술 회상기 완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잇엇다’

여의도 파출소에서 필사의 도주

이관술과 이순금 모두 여의도로 들어올 때 다리 대신 그 아래 습지를 통했다. 당연히 헤어져 돌아갈 때도 그 길을 택했는데 폭우로 불어난 강물에 습지가 모두 잠기고 말았다. 올 때는 영등포 쪽에서 왔지만 이제는 반대로 마포 쪽으로 방향을 틀어, 배를 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결국 비행장 방향으로 움직여 여의교를 건넜다. 둘은 다리를 지키고 있던 일본 경찰에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된다. 이 상황은 이관술이 해방 후 현대일보에 기고한 회상기 마지막 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순사에게 남매가 잡히고 말았는데 당시는 일지사변이 한창 진행 중이라 순사들이 나를 중국 스파이로 의심을 하게 되어 파출소 안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순사들의 대화를 들으니 기가 막힐 형편이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저것들이 일본말도 모르는 게 필시 중국 스파이 같으니 날이 밝거든 영등포 고등계로 넘기자는 것이다.”


이관술은 다리를 건너기 전 이순금과 일본말을 모르는 촌사람이 길을 잘못 든 것으로 위장했던 것인데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일본의 만주침공으로 시작된 전쟁 탓에 ‘스파이’로 오인받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어이가 없었을 것인지 상상이 된다. 그리고 순사들의 말대로 영등포 경찰서로 넘겨진다면 그곳에 분명히 본인과 동생을 아는 형사가 있을 것이 확실했다. 이관술은 어쩔 수 없이 순금만 남겨두고 파출소를 탈출하기로 맘먹었다.
 

▲ 1937.7.23. <조선일보> ‘이재유 일당 이관술 돌연 경성에 출현, 여의도서 발견…’

한강에 뛰어들어 맨몸으로 하숙집까지

밤새 비는 그치지 않았고, 폭우로 넘치는 강물 때문에 도망갈 수 없다 여겼는지 일본 경찰들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결박도 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도망갈 기회를 노리다 경찰들이 조는 틈을 노려 파출소 밖으로 이관술이 달려 나갔다. 경찰들이 도주하는 이관술을 쫓아 나가자 이순금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자 문 앞을 막아섰다. 이순금은 쉽게 제압됐지만 이관술은 빠른 걸음으로 내달릴 틈을 얻었다. 그리고 강가에 도착하자 옷을 모두 벗은 뒤 똘똘 말아 머리에 인 채로 강물로 뛰어들었다. 


급하게 물이 불어난 강을 헤엄칠 수 있었던 것은 고향 입암마을 인근 선바위 앞 태화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이었다. 선바위 앞에는 과거부터 물소용돌이가 있는 백룡담 주변으로 강의 유속이 빨랐다. 강물이 얕아 보이지만 지금도 물놀이하던 피서객들이 방심하다 세상을 뜨는 비보를 전한다. 


이관술은 어릴 적 뛰놀며 키운 수영 실력과 담력 덕분에 무사히 강을 건넜다. 문제는 수영 중에 머리에 이었던 옷이 떠내려가 맨몸으로 영등포 하숙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어두운 길을 밟아 조심스럽게 하숙집에 도착한 뒤에도 주인집 몰래 들어갈 수 있을지 전전긍긍했다. 다행스럽게도 늦은 밤과 요란한 빗소리에 인기척을 지울 수 있었다. 재빠르게 방으로 들어가 새 옷을 챙긴 뒤 날이 밝기만 기다렸다가 경성을 빠져나갔다. 대전으로 가는 남쪽 방향으로 목표를 잡았다.
 

▲ 1937.7.21. “경고특비 865-1 치안유지법 위반 용의자의 행동에 관한 건” 경기도 경찰부

대구에서 1년, 반찬가게 운영하며 독서 모임 조직

이관술은 정체를 숨긴 채 도주했으나 일제 경찰은 체포한 이순금을 통해 정황을 파악했다. 이순금이 출소 후 바로 오빠 이관술을 만날 수 있었던 건 빅진홍이 두 사람을 연결시켰기 때문이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4년 만에 출소한 지 며칠도 안 지나 이순금은 다시 유치장에 갇힌 신세가 됐다. 박진홍 역시 출소 후 두 달 만에 다시 체포당했다. 아마도 이관술은 그 소식을 듣고 땅을 칠만큼 반성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위장생활을 하고 도피 실력을 쌓았다고 해도 방심은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관술은 경성을 떠나 대전으로 내려가는 동안 여인숙도 구하지 않고 다리 밑 걸인들 속에 섞여 잠을 자면서 이동했다.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경계망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경기도경찰은 그해 11월 이재유 계열 6명을 추가로 체포했다고 언론에 발표했는데, 그때도 어김없이 이관술 체포가 가장 큰 숙제라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이관술은 삼엄한 수사망을 피해 도착한 대전에서 한 여름을 보내고 다시 대구로 발걸음을 옮겨 약 1년을 머물렀다. 대구에 들어갈 때는 걸인 행색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신분위장도 바뀌었다. 이관술이 쓴 회상기를 보면 조그만 반찬가게까지 운영했다고 한다. 


‘변장의 천재’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위화감 없이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반전’과 ‘반제국주의’를 걸고 작은 독서 모임을 몇 개 운영하며 새로운 동지들을 규합했다. 1938년 가을 이순금이 석방되자 이전보다 훨씬 더 신중하게 연락을 취했다.
 

▲ 1937.7.28. <조선일보> 이순금 4년 만에 출옥하자마자 체포

이순금과 재회 그리고 김삼룡과 첫 만남

이번에는 경성이 아니라 경찰의 경계가 덜한 수원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다. 1년 만에 다시 만난 이순금은 걱정과 달리 씩씩했다. 수원성 화홍문 앞에서 이순금은 이관술을 만나 자신을 놓아두고 도주한 것을 원망하기보다 체포를 피한 것을 격려했다. 그리고 이관술이 도피 중인 대구에서 항일혁명가들을 조직하고 있다는 소식은 매우 놀랍고 반가웠다. 이관술은 다음에는 경성에서 만나자고 약속한 뒤 헤어져 대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개월 더 머무는 동안 비밀 독서회 조직을 늘려갔다. 


대구를 완전히 떠난 것은 1939년 1월이었다. 이번에는 김삼룡을 만나기 위해 충청북도 충주로 향했다. 충주는 김삼룡이 태어난 고향이다. 김삼룡은 1910년 소작농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사회주의 독서회에서 활동하다 1930년 11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됐다. 김삼룡은 193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일 때 채석장 노역을 나간 자리에서 이재유, 이현상과 만나 동지가 됐다. 다음 해 2월 먼저 출소해 고향에 머물다 같은 해 12월 출소한 이재유를 경성에서 만난 뒤 경성트로이카 결성부터 함께했다. 


김삼룡은 타고난 조직가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하룻밤에 하나의 트로이카를 만들어낸다는 소문이 돌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컸다. 이관술이 김삼룡을 만나러 간 이유도 그런 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재유’라는 교집합을 갖고 같은 조직에 속해 있었지만 만난 적은 없었다. 이관술이 주로 경성에서 독서회를 이끌었다면 김삼룡은 인천을 중심으로 적색노조를 조직하다 1934년에 체포됐기 때문이다. 1937년에 출옥한 뒤로는 다시 고향에 내려와 머물고 있었다.
 

▲ 1937.11.19. <조선일보> ‘이재유 직계 부하 6명 검거’

태창직물 공장 노동자 소그룹부터 시작

이관술과 김삼룡의 만남은 금세 의기투합으로 이어졌다. 이관술은 노해면 공덕리에서 은거해 활동하다 이재유가 검거당했던 과정을 설명했고, 두 사람이 함께할 때 적은 이재유의 자기비판서도 전달했다. 경성 트로이카 검거 과정에서 너무 쉽게 조직이 발각됐던 걸 냉철하게 분석한 것이었다. 둘은 새로운 조직을 재건하는 데 있어 ‘공산당’ 재건을 조급하게 서두르기보다 노동자를 중심에 둔 조직 확장에 무게를 두는 것에 동의했다. 이관술은 김삼룡에게서 다시 조직재건과 노동자 조직에 나서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먼저 경성으로 돌아갔다. 


경성 태창직물 공장은 김삼룡의 부인 이옥숙이 일하던 공장이었다. 이관술과 김삼룡, 이순금은 태창직물을 시작으로 인근 공장에 노동자 소그룹을 만들어 갔다. 감옥에서 나온 이현상이 결합했다. 화요회 계열로 수배 중이던 권오직도 연결됐다. 1939년 5월이 되자 박진홍이 출소한 뒤 동참했고 뒤따라 정태식도 합류했다. 


경성 트로이카 1기와 2기에 걸쳐 최대 500여 명이 체포됐고 감옥에 갇혔지만 조직은 재건됐고 다시 활력이 생겼다. 과거 조직원 중에는 경찰의 압박과 회유로 변절자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새롭게 조직한 동지들은 일제강점기 후반, 국내에서 최후의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조직이 된다. 이 조직이 ‘경성꼼뮤니스트’ 그룹이며 줄여서 ‘경성콤그룹’이라 칭했다. 이관술은 조직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동지들을 규합하는 마중물이 됐다. 그리고 화룡점정을 찍듯이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을 찾아 나선다. 그가 바로 해방 후까지 동행하게 되는 박헌영이다. 

 

 

▲ 이관술과 함께 ‘경성콤그룹’에 참가한 김삼룡, 이현상, 권오직, 정태식(왼쪽부터)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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