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사회에서 포용사회로 강남순 교수 울산 강연

문화 / 이동고 기자 / 2019-06-19 19:57:30
▲ 강남순 교수는 대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같은 현대철학적, 신학적 담론을 가르치고 있다. 특히 임마누엘 칸트, 한나 아렌트, 자크 데리다 등의 사상과 연계해 코즈모폴리턴 권리, 정의, 환대, 사랑 문제에 학문적, 실천적 관심을 기울이며 다양한 국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동고 기자

 

[울산저널]이동고 기자= 울산교육청 1층 외솔관에서 강남순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 신학대학원 교수의 강의가 열렸다. 강 교수는 강의가 끝나고 객석에서 나온 다양한 질문에 모두 답했다. 곱씹어볼 내용이 많아 강연을 요약해 싣는다.<편집자 주>

성숙한 인간은 무엇인가? 어른사람은 몸이 성숙한 사람이고 나이가 어리다고 미성숙하지 않다. 생물학적 나이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아이사람은 몸 성숙은 다르지만 나도 사람, 너도 사람이고 동료로 대하는 것처럼 대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말에는 존대말과 반말이 있다. 처음 보는 아이들인데도 반말을 하고, 생물학적으로 어리다는 이유로 어른의 지시와 명령을 받아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아이를 4개 나라에서 키워봤는데 한국에서 아이를 키울 때가 제일 힘들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했는데 항상 입에 달린 이야기가 “여기는 나를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아”였다. 길거리를 가도 자기에게 반말하고 자동차가 사람 곁을 휙휙 지나가고 한 학년만 높아도 예사로 공을 뺏는다고 억울해했다. 아이 입에서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란 말이 떠나지 않았다. 아이가 미술시간에 ‘우리 학교’를 그려라 해서 창살을 그리고 그 안에 아이를 넣었다. 선생이 다시 그리라고 해서 착한 그림으로 그리고 집으로 늦게 돌아왔다. 그런 걸 몇 번 경험하면 아이는 자기감정을 표현하지 않게 된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목적이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함인가? 모든 교육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변화는 나로부터 일어나길 바란다. 모든 교육은 나로부터 출발한다. 서양은 나를 앞에 둔 개인주의가 발달했다. 아시아권은 ‘우리’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남녀유별 장유유서 등으로 위계적 공동체다. 진정한 수평적 공동체에 근거해 모든 구성원이 나이 성별 위치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교육은 평등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교육이 아니다. 외국 대학은 각자 직급이 있지만 대화할 때는 직급을 붙이지 않고 모두 ‘유(you)’다. 그러기에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다.


서양은 출발이 개인주의이기 때문에 대부분 자신이 잘한다는 자부심이 넘친다. 한국 학생은 스마트하고 똑똑하지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서양 학생들은 말이 되든 안 되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학예회 때 봐도 줄이 엉망진창인데도 서로 떠들고 우리에 비하면 난장판인데도 각자 아주 잘한다는 자부심이 넘친다.


파울로 프레리는 교욱을 크게 ‘은행저축식 교육’과 ‘문제제기식 교육’으로 나눴다. 은행저축식 교육은 선생이 학생에게 정보를 은행잔고 늘리듯 주입하는 방식이다. 억압자의 교육방식이다. 문제제기식 교육은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다. 서로 같이 성숙해가는 방식이다. 수동적으로 일방적으로 듣는 방식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관계를 발전시키는 방식이다.


멘토나 자기계발서를 조심해야 한다. 자기 인생의 지표는 어떤 이가 도움을 받았다고 해서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좌충우돌하면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도 아직 어떤 문제에 있어서는 좌충우돌한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참고서일 뿐이다.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가고 자신의 멘토가 되어야 한다.


뿌리 물음, 즉 “내가 왜 하는지(Why am I doing?)”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해 자주 질문을 던져야 한다. 수업에 빠진 한 학생이 수업에 빠질 수밖에 없다며 자신은 친구의 노트로 보충해서 캐치업(catch up, 띠라잡다)한다고 하길래 너는 캐치업이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다음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지난 강의에서 얻은 중요한 주제 세 가지를 적어내라고 했는데 다 달랐다. 강의는 하나였지만 받아들이는 내용은 다 다른 것으로 캐치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에서 윤리가 시작된다고 말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것에서 윤리가 시작된다는 말이다. 강의실에 트랜스젠더가 다녔는데 먼저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눈을 맞추며 이야기해보니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속에는 항상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편지로 부치지 못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그 사람의 눈빛과 감촉과 온기, 어떨 땐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포옹이 더 많은 감정을 대신한다.

 
중요한 것은 좋은 질문을 배우는 것이다. 질문은 초대장이다. 보다 심오한 사유의 세계로 초대한다. 좋은 질문은 예나 아니오 식 단답형으로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혼 여부를 묻거니 나이와 학번을 확인하는 것에 치중한다. 그 다음에는 위계가 작동한다. 예를 들면 태극기부대 노인들에게 ‘당신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십니까?’가 아니라 ‘당신이 우리 민족을 사랑할 때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십니까?’라든지 기독교인에게도 ‘당신이 신을 사랑할 때 당신은 무엇을 사랑하십니까?’하고 묻는 것이다.


내 강의를 들고 난 뒤 아주 불편했다는 생각이 들면 내 강의는 가치가 있다. 우리는 불편한 것이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 관계에서 가까울수록 ‘모름의 영역’을 남겨 둬야 한다. “당신과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 내가 모르는 것이 어디 있어”하는 순간 부부관계는 금이 간다. 미지의 영역을 남겨 두고 존중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악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사유의 부재로부터 온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을 독가스실에 보냈던 나치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제기했다. ‘내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상충하는 나’와 만나는 것이 비판적 사유의 출발점이다.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혐오가 있다.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 장애인 혐오, 언론도 혐오를 과장 보도하면서 부추긴다. 혐오에는 폭력을 동반하는 ‘직접적인 혐오’가 있다. 또 ‘생략과 무시에 대한 혐오’가 있다. 100분 토론에는 다 남자, 다 비장애인, 고학력자 인정자들이 나온다. 다 여자들이었다면, 다 장애인들이 나왔다면 어떨까?


마지막이 ‘무지에 의한 혐오’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내 속의 사각지대는 무엇인지 읽고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관계론에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나는 애도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다. 사람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항상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애도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자식이 10명이 있다 해도 그 죽음 하나하나는 각기 다른 ‘세계의 종국’이다.


포용은 묵인이 아니다. 분노에는 본능적 분노와 파괴적 분노가 있다. 모두 악마화시키기보다는 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되었나 하는 성찰적 분노가 필요하다. 우리는 진보의 이름으로 악마라고 낙인찍으며 파괴적인 분노를 한다. 미디어에서도 혐오만 부각시킬 뿐 ‘왜’라는 과정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질문을 잘 못 한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자신의 깊은 결을 타인에게 보이는 일이다. 항상 좋은 질문을 고민해야 한다.


이동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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