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지역 두 전설의 국제성

기획/특집 /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 2022-01-15 01:13:47
울산향토사도서관 공동기획

울산 향토사 주제답사(2)

Ⅰ. 아미산(峨嵋山)의 외소나무 전설

명나라 풍수가가 찾아낸 아미산의 천하의 명당, 외소나무만 안다

아미산은 울주군 두서면 전읍리와 미호리에 걸쳐 있다. 중국 명나라 때 유명한 풍수지리학자가 어느 날 저녁에 천문을 살펴보다가 조선의 아미산에서 천하의 명당을 찾았다. 그가 축지법을 써서 조선에 건너와 아미산에서 어렵게 그 명당을 찾아냈다. 그곳에 묘지를 조성하면 후손들이 8대 동안 정승이 날 자리라고 확신하고, 그가 죽으면 묻히기로 결심했다. 그는 명당이 아닌 곳에 혼자만 알 수 있는 표시로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외소나무라고 한다.


그는 명나라로 돌아가 아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고, 명당의 위치를 상세히 알려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이 시신을 화장해서 아미산을 찾아왔다. 그런데 그 명당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 후 조선 팔도의 이름난 풍수들이 그 소문을 듣고 아미산으로 몰려왔으나 그들도 그곳을 찾지 못했고, 지금까지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 찾기’다. 풍수지리설은 죽은 선조의 생기가 후손에게 영향을 끼쳐 발복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미산은 본래 중국 쓰촨성[四川省]에 있는 이름난 산으로, 중국 불교 4대 명산의 하나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에 아미산이라는 지명을 몇 군데 찾아볼 수 있는데, 울산의 아미산도 중국의 명산이라는 지명도와 함께 풍수지리설이 혼합된 전설이다.


이 전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국적은 중국 명나라이고, 신분은 풍수지리학자다. 시대적 배경은 조선 초기다. 지리적 배경은 현재 외소나무가 있는 아미산의 외소나무등대 또는 외소나무등대배기이고, 전설의 증거물은 외소나무다.


‘아미산의 외소나무’는 명나라의 한 풍수지리학자가 아미산에서 천하의 명당을 확인한 명당 전설이다. 또 아미산 남쪽의 산등성이를 외소나무등대이라고 부르는 유래를 설명하는 지명 전설이다. 현재 외소나무등대에 살아 있는 큰 외소나무라는 증거물이 있다는 점에서 설화 중에서 전설에 속한다.

 

▲ 아미산 외소나무 아래 선 탐사회원들

 

▲ 아미산 외소나무등대배기의 외소나무와 천지바위

 

 

천하의 명당 품고 인간에게 내주지 않는 무심한 아미산


아미산은 예로부터 생김새가 편안하다고 할매산, 해가 일찍 뜬다고 해미산이라고도 전해온다. 1910년대 초기 자료인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에는 아미산은 두서면 사음동(舍音洞)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해발 603.6미터로 예전 정상 부근에 나무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경주와 동해가 훤하게 보였다.


이 산은 동서 방향으로 두 곳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 사이의 골짜기를 바람이 많이 불어온다고 하여 바람골이라 부른다.


외소나무가 있는 산등성이를 외소나무등대, 외소나무등대배기라고 한다. 이 나무 앞에 신라 시대부터 전해온다는 천지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1960년대 초에 무제(기우제)를 지냈는데, 바위 위에 제물을 진설하고 그 아래에서 절을 했다.


아미산 바로 동쪽에는 경부고속도로와 국도35호선이 나란히 지나고 있으며, 정상에서 바라보면 남서쪽에 가지산과 신불산 등 영남알프스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 아미산 남쪽 원경

 

▲ 신라시대 장군 묘로 전해오는 고분


Ⅱ. 대마도주등(對馬島主嶝) 전설


남의 명당 훔친 효자, 후손이 대마도에서 왕질하다

고려 때 울산시 두왕동 당랑끝[九男田峙]에 아홉 아들을 둔 김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당랑끝은 그가 9남아를 데리고 살았다고 하여 일명 구남밭티라 불러왔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부친상을 당해 상제의 몸이 됐다. 평소 효심이 깊은 그는 묘 터를 구해 보았으나 쉽사리 구하지 못했다. 어느 날 꿈에 백발의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좋은 묘 터를 얻으려면 감나무진에 있는 객줏집을 찾아가서 머슴이 돼라”고 했다. 꿈에서 깨어난 김 씨는 한동안 망설였으나 결국 간신히 그 객줏집의 머슴이 됐다.


어느 날 한 상주가 풍수와 함께 그 객줏집에 묵으면서 며칠 동안 인근의 산천을 두루 돌아다녔다. 며칠 후에 두 사람이 김 씨를 불러 계란 세 개를 구해 달라고 했다. 그는 계란을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다시 찬물에 식혀서 그들에게 갖다 줬다. 그는 깜박 잠이 들었는데, 지난번의 백발노인이 다시 나타나 “빨리 일어나라.”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밖을 살피니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가니 가까운 산등성이에 이르러 땅을 파고 무엇인가를 묻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윽고 닭울녘에 두 사람은 다시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그 자리를 다시 파더니 고개를 저으며 크게 의아한 몸짓을 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그는 생계란 두 개를 초저녁에 그 자리에 묻어 두었다가 첫새벽에 올라갔다. 그곳에서 계란 한 개가 부화해, 닭이 나래를 치며 목을 쭉 빼어 크게 울었다. 그는 그 자리에 아버지를 봉분이 없이 모셨다. 그 후 그의 자손이 대마도로 건너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 산등성이를 대마도주등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 전설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 발복(發福)이다. 이 전설은 민간에 뿌리 깊은 명당 발복의 풍수지리설을 이용한 권선징악에 대한 이야기다. 효심이 깊은 후손이 명당에 부모를 모심으로써 복을 받는다는 그 명당은 바로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을 가리킨다. 이런 명당에 부친을 안장했기 때문에 후손은 선대의 생기를 받아 왕이 될 수 있었다.


또한 이 전설이 전승되는 두왕동은 본래 대마도주(對馬島主)와 관련시켜 ‘도왕동(道王洞)’이라고 하다가 도(道) 자(字)와 왕(王) 자가 왕을 거역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여 두왕동(斗旺洞)으로 바뀌었다는 것에서 지명 전설의 모티프도 내포하고 있다.


이 전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국적은 조선이고, 신분은 두왕동 달랑끝에 살았던 평범한 남자다. 시대적 배경은 고려시대다. 지리적 배경은 후대에 이름 지은 두왕동의 대마도주등이고, 전설의 증거물은 주인공 아버지의 평장묘(平葬墓)다.


‘대마도주등’은 김 씨 성을 가진 한 남자가 남이 정해 둔 명당에 묘를 써서 후손이 대마도에 건너가 왕이 되었다는 명당 전설이다. 또 남구 두왕동 동쪽의 긴 산등성이를 대마도주등이라고 부르는 유래를 설명하는 지명 전설이기도 하다. 현재 대마도주등 꼭대기에 김 씨 아버지의 묘로 전해 오는 평장묘가 한 기(基) 있고, 그 주위를 바위들로 경계를 삼았는데, 그 증거물이 있다는 점에서 설화 중에서도 전설에 속한다.

 

▲ 대마도주등에 있는 김필두 묘비를 살피고 있다.

 

▲ 대마도주등에 있는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선대 평장묘

 

▲ 대마도주등의 남쪽 원경

 

▲ 대마도주등 전설 제보자

 

▲ 대마도주등 전설 제보자와 채록 일부

후손이 왕질했던 대마도를 늘 바라본다, 대마도주등

대마도주등은 남구 두왕동 동쪽에 현존하는 긴 산등성이를 말한다. 주민들은 대마조조등이라고도 부르고, <조선지지자료>에는 대마도주산(對馬島主山)이 청량면 두왕동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울산의 전설과 민요>(1996)에는 다음의 여러 이야기가 전해온다. 원래 이 묘소에 팔괘형(八卦型)의 석조물이 있었는데, 광복 후 청량지서(靑良支署)의 방축 벽을 쌓을 때 이를 가져가 쌓았기 때문에 지금은 평장묘만 남아 있다. 일설에는 1910년 무렵에 일본인이 비석까지 준비해서 대마도주등 인근에 배미골의 위치를 물으며 찾아왔지만 묘소를 찾지 못하고 비석을 물속에 던지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또 김 씨의 후손들은 남구 상개동에 10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기록돼 있다.


한편 평장묘의 북쪽에 울산 금석문 중 이른 시기에 속하는 1772년에 세운 증(贈) 사근도(沙斤道) 찰방(察訪) 김필두(金弼斗)의 묘비가 묘소와 함께 있다. 이 전설의 주인공 김 씨와 관련 여부는 알 수 없다.

 

▲ 증(贈) 사근도(沙斤道) 찰방(察訪) 김필두(金弼斗)의 묘소와 묘비

 

글: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사진: 김정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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