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타고 능선을 따라 -낙동정맥 영남알프스-

문화 / 최영실 포토 에세이스트 / 2021-06-07 00:00:41
여행 에세이 ‘훌훌 훨훨’

길을 자주 잃는다. 운전도 그리 쉽게 하고 여행도 혼자 다니는데 길을 잃는다니 사람들은 내 말을 잘 믿지 않지만. 남성보다 여성의 공간 감각이 좀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싶다. 특히 낯선 공간에 들어섰다가 밖으로 나오면 동서남북이 오리무중이고 반대편으로 걸어 나가기 일쑤다. 그래서 혼자일 때 잘 하지 않는 게 등산이다. 한 번은 집 뒷산에 올랐다가 하산 때 길을 잃어 택시를 타고 돌아온 적도 있다. 깊고 험한 산이면 이해한다고 해도 동네 나지막한 동산 정도인데도 그런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참 신기한 것이 한순간 잠시 방향을 착각하고 걷는데 멀어지는 정도는 지구 반대편으로 작심하고 걸어간 사람처럼 멀고 먼 곳에 착륙해있다. 


코로나로 등산 인구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특히 젊은 층들이 몰리면서 불황에도 아웃도어 의류 업체들은 호황을 누린다고. 공기 좋고 한적한 것이 도심과 자발적 격리를 하자면 산 만큼 좋은 곳도 없긴 하다. 그러해도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가 가장 이해하지 못할 대답이 등산이었다. 아무리 산행을 좋아하는 사람도 가파른 오르막을 헉헉대고 땀을 콩죽처럼 흘리다 보면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이 힘든 고행을 왜 할까’ 속으로 욕도 하면서 오른다고들 한다. 이십 대 직장 생활을 할 때 단체 MT를 몇 번 다녀온 걸 빼고는 살면서 산을 오르는 일이 드물었다. 


작년부터 근막통증 증후군에 시달리면서 주위의 권유로 산을 오른 것이 시작이었다. 덕유산과 비로봉, 꽤 높고 비교적 산행 시간이 긴 등반을 하면서 어찌 된 일인지 통증이 점차 사라진 것이다. 잔근육을 쓰면서 제자리를 잡아간다는 느낌이 들어 이왕 시작했으니 주기적으로 컨디션이 괜찮은 날 한 달에 한두 번 산행 배낭을 꾸린다. 내 산행은 정상을 꼭 가지는 않고 왕복 두세 시간 정도 거리를 조절해 중간에서 내려오는 정도다. 산을 좋아하는 지인이 어떻게 정상을 가지 않느냐고 하지만 몸을 무리해 욕심을 내는 것보다 중간에서 돌아서는 것도 마음 비우기 일종이 아니냐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대답한 기억이 있다.


오월의 어느 날, 석남터널에 차를 두고 한 시간쯤 오르면 철쭉 군락과 마주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가지산을 올랐다. 올해는 한라산 영실의 철쭉을 꼭 보고 싶었는데 제주가 사람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라 포기하고 택한 산행이었다. 아름다운 것을 어떤 수사로 표현하면 더 아름다울까. ‘하늘은 파랗고 꽃은 붉고 신록의 숲은 눈이 부시다.’ 어찌 보면 유치하기 그지없는 단순한 문장이지만 더 이상 보탤 단어가 필요 없음을. 한껏 여유롭게 능선을 타고 꽃을 즐기며 정상에서 4분의 3지점쯤 될까. 풍광 좋은 중봉에 도착했다. 그만하면 딱 좋은듯해 돌아서려니 여자 등산객 일행이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왜 돌아가냐고 혼자인 내게 동행할 것을 제안했다. 한 번도 가지산 정상을 밟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조금 무리해서라도 가보자 했다. 정상에 도착해 아득하고 아득한 산그리메 풍경 앞에 잘난 척 허리에 손을 올리고 찰칵, 가지산의 인증샷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었다.

 

▲ 재약산. 산철쭉은 철쭉보다 조금 더 짙은 색을 띤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영남알프스 9봉 완등 인증 사업을 울산 울주군에서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산들이기도 하고 내가 사는 곳 주변의 산을 도전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올해 9봉 완등 목표를 두었다. 세상에나, 내가 1000m가 넘는 산 아홉 봉우리에 도전장을 내밀다니.


영남알프스 9봉은 울산, 양산, 밀양, 청도에 걸쳐 있는 해발 1000m가 넘는 산이다. 가지산(1241m), 신불산(1159m), 간월산(1069m), 천황산(1189m), 영축산(1081m), 재약산(1108m), 고헌산(1034m), 운문산(1188m), 그리고 마지막 경주 문복산(1015m)이다. 산림청이 선정한 대한민국 100대 명산 중에 5개의 산이 속해있다.


아직은 산을 오르는 끈기가 부족해 누군가에게 동행의 손을 내민다. 내게는 완등의 의미도 있지만 이 동행의 의미가 더 크다. 우리 모두 얼마나 고독한 시절을 겪고 있는가. 서로 포기하지 않도록 독려하거나, 소소하게 마음에 있는 사연을 나누기도 하고 인생 선배의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첫 가지산을 시작으로 몇 번의 산행을 각자 다른 이들과 함께했고 그 기록을 남긴다.
 

▲ 가지산. 가지산 표지석 뒤에 보이는 태극기를 사람들이 좋아했는데 얼마 전 철거됐다고 한다. 안전하게 다시 태극기가 휘날리길 바란다.

천성산과 재약산(5월 18일)
▲ 천성산. 천성재를 지나는 길 운무 사이로 철쭉이 활짝 피었다.

무릇 길고 기나긴 비는 뜨거운 공기 사이로 해도 났다가 구름도 몰려오다가 예고 없이 마구 쏟아져야 하는 거 아닌가. 한여름 우산도 없이 소나기를 피하려다 눈이 맞는 무수한 사랑의 낭만이 길을 잃게 만드는 봄장마라니. 그에게 비가 오니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했다. 보일 듯 말 듯 피어오르는 운무 사이로 꿈결 같은 꽃길이 펼쳐질 테고 아무도 오지 않을 아름다운 천상의 화원은 우리 것이 아니겠냐고. 혹하는 단어들을 주워 와 넘치게 묘사했다. 평소 산을 싫어하던 그가 말 없이 동행한다. 운무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몽환적인 풍광이 신비롭기 그지없다. 상상했던 장면들이 상상 그 이상일 때 쓰는 단어는 무얼까. 눈이 짓무르도록 선명한 봄꽃들과 산 아래 뽐내며 살고 있는 나는 무릎을 꿇어야 하리. 드러내지 않기의 품격 앞에. “아침에 눈을 떴어. 눈이 안 떠지면 할 수 없지만 눈이 떠졌으니까 하루를 선물 받은 거잖아. 그런데 내일은 눈이 안 떠질 수가 있어. 그러니까 하고 싶었던 소소한 것 한 가지라도 하면서 보내면 내일 눈이 안 떠져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아, 오늘처럼. 오늘, 오늘, 오늘이 선물처럼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비오는 날 뜬금없이 산에 와서 평소 잘 하지 않는 두서없는 말을 하는 나를 그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즘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아 힘이 부치는 당신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던 내 마음을 아는 듯. 봄장마라니, 그러니까 신은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그와의 25주년 결혼기념일 축하 등반이었다.

영축산 (5월 31일)

통도사를 품은 영축산의 묘미는 오르내릴 때 쉬어갈 수 있는 산장이 있다는 것이다. 한 시간 남짓 오르면 만날 수 있는 산장에서는 간단한 음식으로 요기를 할 수 있다.


잔술도 파시나요?


단술요? 단술은 없는데


아니요, 한 잔, 할 때 잔. 한 잔 술요!


호호, 네 있습니다. 드릴게요

 

▲ 영축산. 정상 부근에서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전망 좋은 취서산장

2002년에 공무원 노조 총대를 짊어지고 투쟁하다 해직당한 지인 본부장님과 동행했다. 20여 년 만에 이제 겨우 복직 판결이 났지만 퇴임 나이가 돼서 조직에 다시 복귀하지 못했다. 명예 회복에 맘을 두는 것이지 다른 욕심은 없다지만 자신이 올곧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많은 희생이 따랐다. 가족들이 고스란히 그 고통을 감내했다. 돌아보면 후회 없느냐고, 다음 생에 태어나도 같은 선택을 할 거냐고 물으니 그는 그럴 것 같다고 한다. 인간은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 병이 든다고 한다. 그러해도 뒤돌아보면 물음표가 떠나지 않는 시간이 왜 없을까. 문득문득 요즘 자주 서성거리는 내게 그의 말이 위로다. 그는 이십 년 전 이곳을 여러 번 올랐는데 산장이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앞만 보고, 땅만 보고 걷고 또 걷던 시절을 지나고 주위를 느긋하게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그에게서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세월만큼 공평하고 정직한 것이 또 있을까.

 

▲ 간월산. 바람이 머무는 간월재의 억새는 사계절 모두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소다.


시인 이병률의 <혼자가 혼자에게>라는 산문집을 읽다가 마음이 가는 글귀를 옮겨 본다. ‘나는 능선을 오르는 것이 한 사람을 넘는 것만 같다 …(중략)… 힘겹게 산을 넘을 때마다 힘겹게 한 사람을 여행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산을 넘는 것 같지만 실은 ’한 사람‘을 만나는 과정, 그대로를 따라가 보는 것이다.’
영남알프스 9봉, 기분 좋은 설렘으로 아직 몇몇 산이 남아 있다. 그리고 길을 자주 잃는 내게 나침반이 되어줄 ‘한 사람’이라는 그대들이 있다.

덧: 요즘 영남알프스 9봉 완등 때문에 등산객이 늘어나면서 주말에는 주차난이 심해 마을에 피해를 주거나 쓰레기 문제로 민원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시민과 지자체가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중봉에서 바라보는 영남알프스 능선

최영실 포토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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