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이야기

문화 / 이은민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대표 / 2021-11-23 00:00:48
서평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는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가슴 깊은 곳에서 분출한 분노로 혼란을 자아내는 소설이다. 1980년 범죄 실화 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로 유명하다. 과거의 일에 반성을 표했지만 빛이 그림자를 모두 가릴 수 없다고 평가받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 최근 국가장으로 치러졌다. 책을 읽을수록 어느 날 갑자기 갑충으로 변해버린 카프카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와 잦은 밀고와 배신에도 신부에게 고백으로 면죄를 요청하는 엔도 슈사쿠 <침묵>의 기치지로, 내가 보는 세계는 나의 책임이라는 조 비테일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이 떠올라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린 아들이 다니는 학원 선생에게 유괴돼 살해되자 괴로워하던 어머니가 주위의 끈질긴 권유로 교회를 찾아가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믿음으로 안정된 어머니는 붙잡힌 범인을 용서하려 하고 용서의 증거를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이미 사형선고까지 받은 범인은 신앙적 구원과 사랑 속에 마음이 평화로워져 유가족의 행복까지 기도한다. 이런 뻔뻔한 상황에 절망한 어머니가 자살하고 만다.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나는 새삼스레 그를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지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가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본문에서


아내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할 권리도 분노할 권리도 빼앗겼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은 어미가 화염이 된 감정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태운다. 아내는 희망을 통해 활력을 얻다 좌절하고 범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이야기에 인간의 의지와 정신을 억압해 파멸시키고 마는 거대한 부조리가 보인다. 구조적 폭력에 대한 고발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불합리한 질서 앞에서 강하고 선명하게 인간다움이 일어난다.


불행은 필연이 아니기에 여전히 고통스럽다. 원인도 없이 찾아온 부조리는 인간의 삶을 파편으로 만들어 버린다. 파편이 돼버린 세상에 종교적 논리가 합리성에 대한 믿음을 제공한다. ‘신의 섭리’라는 명백히 단순한 이 한마디로 불분명하고 부조리한 세계는 손쉽게 재건된다. 조각난 파편들이 일순간 합체돼 다른 논리가 불필요하다. 이런 개입은 생명을 지속해야 할 불완전하고 불안한 인간에게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아내도 어느 정도 평화를 찾았다. 불행도 신의 섭리 속에서 이유를 찾았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해서는 안 되지만 가해자에게는 최소한의 적절한 자세를 요구하고 싶다. 죄 없는 아이를 죽인 살인마가 멋대로 신에게 용서를 받아 평안한 표정으로 유가족의 행복까지 언급하는 뻔뻔스런 자세는 아닐 것이다. 이미 아내는 신앙을 통해 믿음을 가져버렸고 모순점에도 거대 질서가 인간을 장악해버려 도피할 공간도 차단됐다. 손발이 다 묶여버려 어떤 행위도 할 수 없는 괴로움의 극한 상태, 쉽게 짓밟히고 존재성도 나약한 벌레가 돼버렸다. 폭력을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규범과 교리, 집단적 강요 속에서 인간에게 무조건적 관용을 요구하는 것은 잔인하고 잔인하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이란 진정한 가치는 불합리의 고발 이상의 것이다. 멀쩡한 합리화의 옷을 입은 폭력, 구조적 거대 질서에 나약하지만 삶의 의지를 가진 우리는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아픔을 함께하고 약함을 안아주며 서로에게 지지대가 되어줄 수 있다. 실수투성이임을 인정하고 서로를 지탱해주는 연대와 공존이 인간다움의 발현이라 생각한다. 사회가 인간다움을 제거한다면 인간만이 약한 자의 능력으로, 연대로 인간을 회복시킬 수 있다.


이은민 인문학협동조합 망원경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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