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작괘천, 천석꾼 송덕비는 길가에 위태롭고

기획/특집 /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 2021-11-24 00:00:58
태화강 100리길 탐사(6)

갓들고개 농바우, 폐허가 된 송태관재실, 상전벽해 들내벌

▲ 소가천못(공암못)에서 바라본 금강폭포


헌남(巘南)> 편찬의 주역 김지환이 쓴 간월사지 ‘삼성각 현판’

김지환은 1975년 울산 최초의 면지 <헌남>를 주도해 편찬했다. 그는 10년 후인 1985년부터 문장과 글씨의 재능을 발휘해 상북면의 주요 기념물에 대해 각각 짓고 썼다. 1985년 양정학원유허비를, 1986년 길천리의 밀양박씨 사당인 충효사(忠孝祠) 숭의당(崇義堂) 상량문을, 1987년 숭의당 현판과 숭의당기를 썼다. 1989년 고헌사창건기념비도 그의 작품이다. 1987년에 간월사지 삼성각 현판을 썼는데, 그의 호인 ‘만성(晩醒)’이 기록돼 있다.
 

▲ 간월사지 삼성각 현판. 글씨를 쓴 김지환의 호 ‘만성(晩醒)’이 보인다.


곳간에서 인심난다, ‘김찬희 시은(施恩) 송덕비’

김찬희(1880~1950)는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화천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4명의 아들 중 첫째 아들은 2대 상북면장(1936~1945)을 지낸 김교완이다. 광복 직후에 상북면에서 5정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재촌(在村) 지주는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했던 석남사를 포함해 16명이다. 석남사 다음이 김찬희이며 그의 아들 김교완도 함께 포함됐다. 등억리가 가장 많았는데 7명이다. 김찬희는 일제강점기에 상북면의 천석꾼으로 상북면 극빈자들의 호세(戶稅)를 대신 납부하고, 춘추로 휼빈소(恤貧所)를 설치해 가난한 주민들을 도왔다. 그는 1922년 울주군 상북면 사립 양정학원 설립에 1000원을, 1948년 언양중학교를 언양읍 어음리로 옮길 때 토지 대금으로 약 120만 원을 기부했다. 1930년 6월에 향인들이 그의 공적을 기려 시은송덕비를 세웠다.

 

▲ 김찬희 시은 송덕비

땔감을 지고, 이고 내려왔던 고달팠던 ‘갓들고개’

삼남읍행정복지센터에서 자수정동굴나라를 거쳐 상북면 등억리 화천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다. 교동리 수정마을에서 구봉저수지를 지나면 곧 왼쪽에 베난바우, 오른쪽에 농바우가 있다.


자수정동굴나라 서쪽에 이 고개와 잇대어 넓은 ‘갓들’이 현존하는데, ‘갓’은 ‘산’의 울산 사투리다. 예전의 수정마을과 인근 주민들은 억새 등 땔감을 장만하러 다녔고, 불교신자들은 석남사와 간월사를 오가던 길이었다.
 

▲ 갓들고개


예전에는 작천(酌川)으로 많이 불렸던 ‘작괘천’

이 하천은 상북면 등억리에서 삼남읍 신화리의 합수거랑에 이르는 8.5㎞의 하천으로 작천, 작수천(酌水川)이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작천보, 중남초등학교 작천분교장 등 작천으로 많이 불렸다. 작괘천이라는 명칭은 큰 술잔과 흡사해 마치 냇물에 술잔을 띄어 놓은 것 같아서 지명으로 정착했다.

 

▲ 작괘천


화장산과 함께 언양읍과 상북면으로 나뉘는 ‘부로산’

삼남읍 교동리와 상북면 등억리에 걸쳐 있는 350m의 산으로 작괘천을 사이에 두고 남쪽의 옥산과 마주하고 있다. <헌산지>와 <조선지지자료>에는 부로산으로 기록돼 있고,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여 최근에는 주로 봉화산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주민들이 사망하면 이 산에서 화장을 많이 했다고 해 화장산(火葬山)이라고도 한다. 북쪽의 상북면 천전리 주민들은 예로부터 앞산이라 불러왔다. 울산 최초의 면지 <헌남>(1975)에 ‘봉수산(烽燧山) 한 줄기가 장사(長蛇)의 형상으로 범머리(화장산)의 돌진을 멈추게 했다’고 기록돼 있다.

 

▲ 부로산


언양읍성의 성돌 될 뻔했던 ‘농바우[籠巖]’

옥산의 남쪽에 현존하는 바위다. 마치 2층 농처럼 생겼다고 하여 옷장바우라고도 한다. 언양읍성을 축조할 당시 신령스런 할머니가 바위를 머리에 이고 가다가 성이 완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놓고 갔다고 전해온다. 새 삼남면사무소가 2017년 1월 20일 신축 준공돼 이 바위를 그곳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 농바우


상북면 양등리 재실과 함께 폐허가 돼버린 은진송씨 ‘송태관재실’

삼남읍 가천리 소가천저수지의 동북쪽에 폐허로 남아 있는 은진송씨재실이다. 송태관이 그의 부친 송헌겸을 추모해 지은 것이다. 상북면 양등리의 또 다른 은진송씨 재실인 ‘영모재(永慕齋)’도 이 재실처럼 많이 퇴락했지만 현판은 남아 있는데 이곳에는 없다. 이 건물을 송태관의 별장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두 견해 모두 단정할 수 없다.

 

▲ 송태관재실


의친왕(義親王)이 전액(篆額)을 쓴 송석하의 조부 송헌겸의 묘소

송헌겸은 1854년 공암리(孔巖里)에서 태어나 1884년 31세에 사망했다. 자식으로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송태관의 슬하에 아들 석하, 석구, 석찬이 태어났다. 특이한 점은 1907년에 고종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이 이 묘비에 전액(篆額)을 쓴 것이다.

 

▲ 송석하 조부 송헌겸 묘소


논 판다고 소문나면 죽은 통도사 스님도 쫓아왔던 ‘뒷골들’

고장산의 북쪽에 있는 들로 소가천저수지의 서쪽에 위치한다. 이 들은 벼농사가 잘 되어 방아를 찧어 놓으면 나락과 쌀의 양이 같다고 한다. 이곳 토지 소유자의 아들에게는 선보지 않고 딸을 시집보내고, 토지를 매각한다고 소문이 나면 염(殮)해 둔 통도사 스님도 이 땅을 매입하려고 벌떡 일어날 정도로 땅이 비옥해 농사가 잘되던 들이었으나 지금은 폐허가 됐다.
 

▲ 뒷골들


개 잡아먹은 고장봉(庫藏峰)의 ‘호석바우[虎石]’

이 산은 대가천마을의 뒷산으로 고장산, 꼬장산이라고도 하며 어느 쪽에서 바라보아도 삿갓을 엎어놓은 것 같다. 이 산의 남쪽 산중턱에 범바우, 또는 호석바우가 있다. 호랑이가 산에 많이 살고 있을 때 마을의 개를 물고 가서 잡아먹은 바위라고 전한다. 마을에서 이 바위가 노출되면 불길하다고 여겨 이곳의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 비보(裨補) 풍수의 한 예다

 

계묘년(癸卯年) 보리 흉년에 축조한 ‘장자골큰못’


이 못은 계묘년(癸卯年) 보리흉년이 들었던 1963년에 조성했다. 이 못에 편입된 부지는 몽리민이 부담했다는 <삼남면지>(2002)의 기록과는 다르게 정부가 매입하고, 군경 유가족에게는 대체 농지로 바꿔줬다. 공교롭게도 1963년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흉년으로 기록돼 계묘년(癸卯年) 보리 흉년, 계묘년 보릿고개 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최악의 흉년에 이 못의 기공식은 언양중고등학교 악대부까지 동원해 성대하게 치렀다. 이 공사의 인건비는 품삯 대신 미국에서 원조해 준 밀가루로 지급했다. 그래서 이 못은 밀가리못이라는 별칭이 전해오고 있다. 혹독한 흉년에 이 밀가루라도 받기 위해 당시 삼남면민들 뿐 아니라 먼 곳에서 몰려온 주민들은 인근에 방까지 얻어 놓고 이 일에 매달렸다. 남자들은 주로 베락더미를 비롯한 인근의 돌덩이를 지게로 져 날랐고, 여자들은 주로 못둑을 다지는 망깨 작업을 많이 했다.

 

▲ 장자골큰못에서 바라본 고장봉


잘살아보자! 상전벽해 거듭했던 ‘들내벌’

이 들은 ‘들내들’이라고도 하며, 가천마을회관의 남쪽에 있는 들로 고장산의 동남쪽에 위치한다. 옛날에 베락더미가 큰 벼락이 맞아 산산조각이 나서 너덜 지대로 바뀌었다. 이곳 엄청난 분량의 돌덩이들이 1963년 장자골큰못을 축조할 때 쓰였다. 주민들에게는 그 자체가 고된 노역이었지만 직선거리로 약 200m밖에 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못이 완공돼 물 걱정이 없어진 드넓은 들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거듭했다. 이제까지 콩, 수박, 메밀 등을 심었던 밭이 높은 부가가치와 당시 정부의 미곡증산계획과 맞물려 모두 논으로 변경됐다. 그러나 더 높은 소득을 위해 그 후에 배 과수원으로 전환했다. 애초에 몽리 면적은 2002년 기준으로 약 40㏊였지만 순수한 벼농사 면적은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현재 이 들판은 더 높은 부가가치를 좇아 거대한 공단으로 변해버렸다.

 

▲ 들내벌

 

▲ 장자골큰못에서 탐사팀

글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사진 김정수 사진작가

※ 이 글은 울산민관협치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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