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정판사 사건’으로 누명 쓰고 체포된 이관술

기획/특집 / 배문석 / 2021-11-24 00:00:59
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5)

이관술과 권오직이 1946년 5월 16일 소위 ‘정판사 위폐사건’에 대해 거짓된 조작이라고 성명을 밝힌 때는 이미 미군청 경찰이 체포령을 낸 상태였다. 이제 이관술은 일제강점기 일본 경찰의 체포망을 피하며 조국 해방을 맞은 뒤 겨우 9개월 만에 미군정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제강점기 경찰의 고위 관료와 미군정 경찰의 고위 관료가 거의 동일했다는 점이다. 


특히 ‘정판사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던 본정 경찰서의 이구범은 일제강점기 친일 경찰 출신이다. 그의 친일 행각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정도였다. 이구범은 해방이 되기 직전 개성경찰서에서 근무하다 일제전쟁에 협력할 목적으로 송도항공회사를 설립한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수사주임을 맡았던 최난수 역시 친일 경찰 출신이다. 그들의 지휘를 받았던 김원기, 현음성, 김헝환, 이희낭 등은 경찰 발표 이전에 체포된 피의자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일경의 수법 그대로였다.
 

▲ 1946년 5월 17일 <중앙신문> 박헌영 ‘미군정 러취 장관 방문’

권오직은 월북을 결심했지만 이관술은 남쪽에 남아…

이관술은 권오직이 함께 성명을 내기 전에 조선정판사 직원들이 체포당하는 상황에 항의하려고 장택상 경찰청장 면담 신청을 하고 방문한 바 있었다. 바로 5월 6일인데 장택상은 면담을 피해버렸고 오히려 그날 밤 이관술과 권오직에 대해 지명수배를 했다. 


그 뒤 박헌영과 이주하를 비롯해 조선공산당은 전력을 다해 ‘진실을 밝히고 거짓 조사를 중단하라’고 백방으로 요청했다. 박헌영은 <조선인민보>를 통해 사실을 조작하는 경찰 발표와 우익 언론의 공세에 다음과 같이 입장을 냈다. “공산당은 방화라든가 지폐 위조 같은 것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상식입니다. 왜냐면 공산당은 인민대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민대중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또 할 수 없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박헌영이 직접 미군정청을 방문하고 이주하가 경찰청장을 만날수록 조선공산당을 공격할 목적이라는 것만 더욱 절감하게 됐다. 특히 미군정청을 항의차 방문했을 때 박헌영은 장관은커녕 공보부장도 만나지 못할 만큼 홀대를 받았다. 전체 상황은 이미 함정을 파고 덫에 걸린 형세였던 것이다. 결국 조선공산당 수뇌부는 이관술과 권오직의 거취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을 만나 ‘고문만 하지 않는다면 출두하게 하겠소’라고 밝혔지만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먼저 권오직은 수배가 떨어지자 북으로 넘어가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월북을 단행했다. 하지만 이관술의 선택은 달랐다. 곧바로 북으로 떠난 권오직과 달리 남쪽에 남아 도피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조선공산당의 총무부장으로 당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을 뿐더러 당의 운영에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관술의 도피 생활은 의외의 모습이었다. 경찰이 수배를 시작한 뒤 두 달 만에 체포된 이관술은 마치 평온한 일상을 보내듯 서점을 들렀다가 체포됐다. 이관술은 혁명 동료이자 연인이자 부인이었던 박선숙의 집에 기거했다. 서울시내 한복판인 충신동(현 종로구) 76번지다. 비록 새벽 일찍 집을 나가 밤늦게 돌아오며 경찰의 시선을 피했다지만 대담한 도피 생활이 벌인 것이다.
 

▲ 1946년 5월 17일 <가정신문> 박현영, ‘고문만 않으면 출두하게 하겠소’

이관술의 짧은 도피생활…일제강점기와는 너무도 달라

박선숙은 해방 후 종로 화신백화점 옆 건물에서 미장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당연히 경찰이 이관술의 행방을 쫓는 조사를 할 때 찾게 될 이였다. 이관술도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가 1935년 경성 트로이카 지도부로 이재유와 도피 생활을 했던 전력을 기억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그때 두 사람은 신분을 위장하고 농사를 지으며 경찰들까지 속일 만큼 철저하게 지하 생활을 했다. 특히 탈출과 변장의 달인이라고 꼽혔던 이가 아닌가. 솥 땜쟁이, 거렁뱅이, 지게꾼, 보부상으로 때마다 변신하며 일경의 수사망을 피했던 게 이관술이다. 


이관술은 변장도 없이 평상시처럼 충신동 박선숙의 집에서 생활하다 그녀가 운영하는 미장원 아래 ‘해방서점’에 나가 책을 골라 집으로 돌아오길 여러 번 했다고 한다. 해방서점의 주인은 박선숙과 미장원을 동업한 이의 남편이었다. 이관술이 체포 당일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왔지만 전혀 신분을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체포된 날의 정황까지 보면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여유로운 도피였다. 


이관술의 집과 서점을 오갔던 일상은 검거당한 날에도 이어졌다. 그날 오후 2시 반에 해방서점에서 책을 사서 나오다 그 앞에서 대기 중이던 형사들에게 체포된 것이다. 그런데 경찰 발표를 보면 이날 체포하기 수 주일 전에도 남대문시장에서 형사가 발견했지만 재빨리 도망쳐 체포를 피했다고 한다. 결국 뻔히 체포망이 좁혀진 상황에서도 서점을 다닌 행적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정을 모두 짐작할 수 없다. 다만 수배령이 떨어지기 전 경찰청장 장택상에게 면담 신청을 할 만큼 본인이 누명을 썼다고 여긴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무리 박헌영에 이어 조선공산당의 2인자로 꼽히면서 당의 운영을 책임지는 중요 직책에 있었다고 하지만 월북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봐도 무언가 당당함을 가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 1946년 7월 9일 <한성일보> 이관술 체포 관련 기사

이관술은 장택상이 직접 취조…이관술 없이 시작된 첫 재판은 아수라장

이관술은 7월 6일 검거된 직후 종로경찰서에 구금돼 1차 취조를 받았다. 다음날 7일 본정 경찰서로 이송됐다. 그런데 하루만인 8일 중앙청으로 또 한 번 이송된다. 바로 미군정 경찰조직의 최고 잭임자였던 장택상이 직접 취조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당시 신문 기사를 보면 경기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은 9일 기자들과 만나 “이관술 씨는 피검되자 즉시 나에게 대어 달라고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수 일 중에 직접 취조하겠다”는 말을 언론에 흘린 것이다. 경찰은 같은 날 뚝섬 위폐사건 피의자 3명과 정판사 위폐 사건 피의자 12명 등 총 15명과 압수한 증거물을 모두 모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국했다. 

 

 

▲ 1946년 7월 10일 <현대일보> 장택상, “이씨 취조 내가 할 터”

이렇게 검찰로 수사가 넘어간 것은 경찰이 수사를 개시한 후 2개월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실제로 이는 요식에 불과할 뿐인데 이미 검사국에서는 두 명의 검사를 본정 경찰서로 파견해 취조해왔기 때문이다. 사국은 송국한 지 10일이 지난 7월 19일 총 13명을 기소하면서 사건을 재판에 넘겼다. 


이관술은 그 과정에서 자신의 혐의사실을 모두 완강하게 부인했다. 경찰의 고문으로도 이관술의 진술을 바꿀 수 없었는데 이미 일제강점기에도 모든 고문을 견뎠던 전력이 있으니 두 말 할 게 없었다. 재판에 넘겨진 정판사 사건의 첫 공판이 7월 29일에 열렸지만 이관술에 관련한 부분은 결국 제외된 채 시작됐다.


첫 재판이 열리기 전부터 조선공산당 주변은 들끓었다. 이관술의 동생 이순금이 쓴 절절한 글과 제자 박진홍의 글이 연이어 신문에 게재됐다. 언론인 모임인 ‘기자회’는 미군정 러취 장관에게 취재와 비판의 자유를 보장하라며 공판에 앞서 성명을 내기도 했다. 그리고 폐쇄된 ‘정판사’ 인쇄소에서 일하던 직공들이 일자리를 잃고 생계 문제에 직면한 딱한 처지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 글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결국 첫 재판에 몰린 5000여 명의 군중들이 쏟아낸 함성과 몸싸움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까지 하게 됐다. 그 과정에 중학생 한 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고, 50여 명이 체포되는 사건으로 번지게 된다. 

 

▲ 1946년 7월 30일 <현대일보> ‘첫 공판 근처에서 군중 다수 피검’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