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 수배 6년만에 체포…친일경찰 노덕술에게 고문당해

기획/특집 / 배문석 / 2021-06-15 00:00:41
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10)

이관술이 박헌영 대신 함경북도로 출발해 청진에 도착한 때가 1940년 5월이다. 이관술은 그 곳에서 먼저 장순명(1900~?)을 만났다. 장순명은 함남 원산 출신으로 신흥청년동맹과 고려공청년회에서 활동했다. 1925년 인천노동총동맹에서 활동하던 중 체포, 수감됐다가 옥중에서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에 연루돼 1929년에 석방된 이력을 지녔다. 장순명의 동생은 도명으로 박헌영이 러시아 망명 기간에 다녔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졸업생이다. 두 형제는 1930년 초반부터 함북 일대에서 적색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조직해왔다. 그중 청진에서 운수노동자 파업과 수리조합 반대격문 사건 등을 주도해 징역을 살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 엽서에 담긴 청진항 모습

청진에서 펴낸 기관지 <붉은 길>

이관술은 장순명을 만나 그가 주도해 1939년 말에 결성한 함북노농조합조직준비위원회에서 발간하고 있는 기관지 <적기>를 받아보았다. 이관술이 이재유와 양주에서 은거하며 지하활동을 할 때 발간했던 조선공산당경성재건그룹의 기관지와 이름이 같았다. 이관술은 장순명과 협의를 거쳐 기관지 이름을 <붉은 길>로 바꿔 발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9월, 함북노농조합조직준비위를 청진좌익노동조합조직준비위로 재편했다. 


경성콤그룹 함경도 지역 조직도 박차를 가했다. 장순명와 함께 적색노조운동을 펼치고 있었던 김형관(1901~?) 역시 박헌영과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리고 한 해 앞서 경성에서 파견했던 김섬(1907~?)과 강귀남(1911~?)도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이관술은 낯선 땅이었던 함경도에서도 쉼 없이 움직였다. 흥남비료공장 노동자 조직에 나섰고, 청진 주을광업소 노조 결성도 지도했다. 이관술이 해방 후 회상기에서 밝혔던 산중토굴에서 기관지를 제작하면서 무장조직을 시도했던 것도 주을광업소 광산노동자들과 도모한 일이었다. 경찰 검거를 피해 1940년 10월 초에 산에 올라 한 달 반 정도를 생활했다고 한다. 


그 뒤로 회령 계림탄광으로 조직원 안병도를 보내 광산노동자 조직에 다시 나섰다. 그때 조직된 광부들이 조선혁명계림탄광노동조합을 결성했다.
 

▲ 1940년 이관술이 함경도에서 함께 활동했던 경성콤그룹, 왼쪽부터 장순명, 강귀남, 김형관

‘서대문사건’ 대규모 검거…경성으로 귀환

함경도 지역에서 한창 활동하고 있을 때 경성콤그룹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시작됐다. 서대문경찰서가 주도했다고 해서 ‘서대문사건’으로 불린다. 11월에 일본유학생부 책임자였던 김덕연(1915~1943)이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검거망이 조여 왔다. 이현상과 김삼룡이 12월에 체포됐다. 그리고 권오직, 서중석(1904~?) 등이 잇따라 체포된다. 겨우 체포를 피한 김순룡 등은 경성을 빠져나가 도피해야 했다. 


이관술은 핵심지도부가 연이어 검거되는 소식을 듣고 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경성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1940년 12월에 경성에 돌아왔으니 7개월 만의 귀환이었다. 이때도 변장의 달인답게 구두닦이로 위장해 서대문서 앞까지 접근했다고 한다. 끌려간 동지들의 상황을 알아볼 목적으로 짐작된다. 


검거된 지도부의 빈자리를 메울 방안을 세우기 위해 이현상과 함께 인민전선부를 책임지고 있었던 김태준을 만났다. 김태준은 평안북도 운산 출신으로 경성제국대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이었다. 중국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해 연구서와 편역서를 출판했던 촉망 받던 학자였다. 그는 경성제대에서 ‘조선문학’ 강사로 재직 중에 경성콤그룹에 참가했다. 경성제대 시절 ‘경제연구회’에 가입해 사회주의 이론을 공부했고, 이현상과 깊었던 친분이 배경이었다. 


이관술은 아직 일제 경찰에 체포된 적이 없고, 경성제대 강사라는 안전한 신분이 있는 김태준에게 경성지역 조직 복구를 맡기게 된다. 하지만 이미 경찰의 검거망 안에 김태준도 들어있던 것을 몰랐다. 결국 김태준의 집을 다시 찾은 순간 주변에 잠복 중인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그때가 1941년 1월 7일이었다.

네 차례에 걸친 검거 광풍

이관술이 수배 6년 만에 체포된 이후로도 검거는 계속됐다. 박헌영은 검거를 피해 광주로 피신했고, 이순금을 비롯해 김순용, 조재옥, 강귀남, 조중심 등은 수배 명단에 올랐다. 경성콤그룹의 지역 책임자들이 연행되면서 지역조직들은 사실상 와해되거나 개별적인 활동으로 들어가게 된다. 


대구 책임자 정재철에 이어 제주 책임자 김응빈과 마산 책임자 권우성도 1941년에 검거됐다. 함남 책임자 김섬은 산으로 들어갔고, 고양으로 피신했던 기관지 출판원 김순룡은 1941년 말에 검거됐다. 그리고 적색노동조합과 적색농민조합을 통해 조직된 이들도 체포되기 시작했다. 경성지역 최병희, 이주상(1915~?), 부산 조복례, 청진 김형관 등이 적색노조 조직원이었고, 적색농조 활동을 한 창원의 이안호(1911~?)도 체포됐다. 학생 중에는 경성여의전에 다닌 이현우(1916~?), 일본유학생 윤한조(1921~?)가 있다. 


1942년까지 계속된 검거로 체포된 숫자는 100명을 넘어섰다. 체포당한 조직원들은 모두 살인적인 고문 수사를 겪었다. 검거를 피해 도망간 이들을 추가로 체포하기 위한 실토가 필요했고, 경성콤그룹의 실체를 정확히 그려내려는 목적이었다. 


취조 과정에서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이 있다. 경성콤그룹 조직원 중 김순원, 김재병, 김덕연 등은 체포 후 경찰조사를 받는 과정에 받은 고문으로 심한 후유증을 겪었다. 결국 세 사람 모두 감옥 안에서 사망했다. 그렇게 살인적인 고문수사를 총괄한 이가 노덕술(1899~1968)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최악의 친일파를 뽑을 때 빠지지 않는 이다. 


노덕술은 1943년에 계급이 ‘경시’(현 총경)까지 올랐다. 일제강점기에 친일한 조선인 경찰 중 단 12명에 불과한 가장 높은 계급이다. 승진한 때는 경성콤그룹의 고문 수사를 마치고 법원으로 넘어간 후였다. 경성콤그룹의 핏물을 짜낸 공로를 인정받은 셈이다.
 

▲ 1942년, 이관술을 비롯한 경성콤그룹 피고인 명단

악질 친일파 노덕술 

 

▲ 경성콤그룹 조직원에게 악랄한 고문 수사를 벌인 노덕술(왼쪽)과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 김덕연

노덕술은 울산 장생포 출신이다. 울산보통학교(현 울산초)를 중퇴한 뒤 일본 홋카이도로 건너가 잡화상에서 일했다. 경찰에 발을 들인 것은 1920년 6월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한 뒤 9월 수료하면서부터다. 울산경찰서에 재직 중 1924년 경부보(현 경위)로 승진했고, 이후 부산으로 가 1927년 신간회 간부 박일향을 고문 수사했다. 1928년에는 혁조회 회원 3명이 노덕술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한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을 체포해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노덕술은 악독한 고문 실력을 바탕으로 1932년 경부(현 경감)로 제법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일반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사법계보다 사상범을 다루는 고등계가 출세에 이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경부로 승진한 후 경남 통영경찰서에 근무할 때는 노동절 집회에 참여한 김재학을 검거하기도 했다. 이후 서울, 인천, 양주, 개성 등을 거쳐 경성콤그룹이 검거되는 1941년, 종로경찰서 주임으로 발령났다. 


이관술은 취조받을 때 노덕술과 맞닥뜨리게 됐다. 노덕술 역시 당시 국내 독립운동 수배자 중 최상급에 속하는 이관술에게 그가 갖고 있는 고문기술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같은 고향을 가진 두 사람이만 삶의 궤적이 완전히 다른 비극의 한 장면이 연상된다. 그 순간을 기록한 내용이 해방 후 <조선인민보>와 1946년 4월 16일 인터뷰한 기사에 나온다.


“나의 과거 생활 중 가장 유쾌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체포되었을 때 박헌영 동지와 동생 순금의 주소를 말하라고 무서운 고문을 당할 때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중대 기로에 처했는데 나는 죽기로 맹세하고 13일간을 단식하다가 전에 함남 지방에서 일하던 것을 이용하여 허구를 꾸며서 그들을 감쪽같이 속인 일이다. 그리고 3일간을 단식한 후 쓰러진 체하여 의사를 부른 사이에 미리 병에 받아 놓았던 커피를 머금고 있다가 의무실에 가서 각혈을 하는 것같이 토하여 보석을 하게 만든 것 등이다.”


이관술이 회상한 기억처럼 일본 경찰이 가장 혈안이 됐던 것은 박헌영의 행방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관술은 알고 있을 것이라 여기고 치가 떨리는 고문을 계속 가했다. 체포된 박진홍과 달리 오리무중이 된 이순금의 행방도 알아내려고 애를 썼다. 


이관술은 박헌영이 기거했던 비밀 아지트를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비밀을 지켜냈다. 동생 이순금에 대한 것도 모른다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이관술은 죽음이 눈앞에 온 것 같은 순간에 단식으로 항거했다. 두 주 가까이 단식하면서 거짓 진술로 모면했다고 말한다. 거기에다 마치 각혈하는 것처럼 속여 이후 병보석 석방까지 얻어낼 수 있었다는 부분에 이른다. 


이관술이 밝힌 회상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박헌영과 이순금 두 사람이 끝까지 체포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고, 이관술이 병보석으로 잠시나마 석방된 것도 맞다. 그리고 피를 토하는 폐질환의 경우 다른 병보다 전염성이 높아 감옥에서 내보내 치료하게 한 것이다. 그렇게 이관술은 1943년 12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잠시 풀려나 고향 입암마을로 되돌아오게 된다. 

 

▲ 1943년(쇼와18년) 이관술 관련 서대문형무소 서류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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