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의 경고

기획/특집 / 배성동 시민/소설가 / 2021-09-14 00:00:29
연재

조선범 망명 보고서(21)

▲ ©문정훈 화가


나는 숲이다

왕은 반구천이 내려다보이는 범굴에서 태어났고, 선선한 해풍이 부는 대왕암 송림을 뛰놀며 자랐지. 반구대 건너각단에는 왕을 숭배하는 인간들이 그린 바위그림이 있어. 유심히 살펴보면 이 땅을 지배하던 왕족들이 스무 세 마리나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집단으로 그려진 바위그림은 세계 어디에도 없어. 왕은 7천 년 전에 그려진 이 바위그림에 깊은 애착을 느껴. 귀여운 새끼들에게도 말하지. “얘야, 잊지 말거라. 반구대 바위그림 속에 너희들의 조상이 있다”고. 물론 고구려 고분벽화 무용총 수렵도에도 우리 왕족들이 나오곤 하지. 말 탄 장수가 왕족들을 가운데로 몰아넣어 활을 쏘는 장면은 정말 웃겨. 장수 하나쯤은 왕의 앞발치기 한 방이면 목이 달아나는데 말야. 왕의 가공할 점프력은 상상을 초월해. 스프링 같은 네 발로 점프를 하면 3~4미터 바위는 단숨에 오르고, 코끼리 등짝 위에 있는 조련사쯤은 거뜬히 낚아챌 수 있어. 


반구대는 대대손손 물려받은 왕국이야. 왕이 선호하는 왕국은 잠복처로 삼을 수 있는 무성한 초목이 있고, 물과 쉽게 접촉할 수 있는 계곡이 인접한 데야. 은폐물과 먹잇감이 있다면 그 위치가 다소 완만한 골짜기이거나 평지라도 관계없어. 특히 바위 봉우리와 연결된 구릉수택은 왕이 좋아하는 데야. 바로 그곳이 반구천이지. 


왕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죽음의 심판자야. 산을 이고 사는 산골 사람들은 ‘산군’, ‘산 지킴이’라 부르더군. 그리고 만주족들은 죄를 지은 사람을 벌주는 ‘심판자’,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숲의 신 ‘암바’라 해. 왕을 표범과 한통속으로 보는 얼간이도 있더군. 호랑이와 표범을 가리지 않고 두루뭉술 범이라 부르는 모양인데, 왕을 잘 아는 산포수들은 호랑이를 줄범, 표범은 불범으로 구분해 부르지. 


단독 생활을 하는 왕은 외로운 영혼이야. 남들은 백수의 제왕이라 하지만 왕은 늘 외톨박이야. 그건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왕족의 숙명인지도 몰라. 왕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한곳에 머물지 않고 늘 돌아다녀야 하지. 피의 징수를 하러 다니면서도 지독한 고독감을 느끼곤 해. 밤에 우짖는 것도 사무치게 짝을 찾는 애수곡쯤으로 생각하면 돼. 


왕에게는 천 리 안팎의 영토가 필요해. 야행성인 왕은 낮이면 덤불 속에서 잠을 자고, 밤이면 영역 순찰에 나서. 특별한 경우에는 방어진 대왕암 송림에서부터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시베리아 극동까지 광범위하게 돌아다닐 때도 있어. 평소는 백 리, 짝을 찾아 움직일 때는 수백 리를 돌아다니기도 해. 그래도 전혀 힘들어하지 않아.


왕의 영역을 도전하는 녀석이라면 인간이든 곰이든 그 누구도 결코 용서하는 법이 없지. 적이라면 시베리아 광야를 달리는 기관차처럼 질주해서 달려들지. 왕족이라고 예외는 없어. 특히 영토 싸움에는 누가 죽어야 끝이 나. 곰이나 늑대는 동족끼리 싸워도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 않으나 왕족은 달라. 왕족 간의 혈투는 곧 죽음이야. 


타이가(Taiga)는 왕의 허락 없이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금단의 숲이야. 타이가의 뭇 생명은 왕이 자비를 베풀어야만 살아갈 수 있어. 특히 두 발로 걷는 인간 종족들이 타이가에 나타나면 신경은 더욱 곤두서. 허나 무력한 두 발 인간들은 왕이 불가항력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아. 무기를 들고 싸우기보다는 차라리 제당을 만들어 자비를 빌어. 조선 산골이나 북만주 여기저기에는 왕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인간들은 매년 몇 차례 의식을 올려 공양을 바쳐.

인간과의 만남

그날 왕은 먼발치에서 인간들을 지켜보고 있었지. 왕이 너희들을 백 번 볼 때 너희는 왕을 한 번 봐. 왕의 줄무늬 외투는 인간의 눈에 쉽게 띄지 않지. 숲속에 매복해 있다가 습격하면 누구도 속수무책이야. 왕의 기습 공격은 제아무리 날고 기는 인간이라도 위협적이야. 한 번은 야간에 일본 척후병들이 멋모르고 들어왔더군. 밤눈 어두운 인간들은 맹수의 밤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해. 왕의 눈은 야간투시경보다 더 정확해. 어두워질수록 더 밝아지고 매복도 능해져. 거기다 청각은 인간보다 몇십 배나 밝아. 마음만 먹으면 눈 깜박할 사이에 목을 부러트릴 수 있어. 왕은 몰래 다가가 경험 없는 이 척후병 목덜미를 물어 뚫어 숨통을 끊어버렸지. 왕의 영역에 침범한 대가야. 


왕은 만주와 연해주를 돌면서 숲을 깡그리 없애는 현장을 목격하곤 몹시 분노했어. 아라사 백인, 만주족, 조선인 할 것 없이 각처에서 몰려든 인간들이 우리 보금자리를 밀고 있더군. 뭇 짐승들이 사는 타이가 수림을 쓰러트리고, 불을 질러 숲을 없애고, 몸을 숨길 덤불조차 깡그리 뭉개고 있었어. 이미 완성된 철로 위로는 폭주 기관차가 굉음을 지르며 달리더군. 번쩍거리며 달려오는 괴물 같았어. 그 굉음이 어찌나 컸던지 왕의 황금빛 벨벳 외투의 털투성이가 날리고 사지가 떨리더군. 조용히 타이가를 지켜왔던 왕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어. 인간에 대한 증오가 차올라 견딜 수가 없더군. 왕은 타이가의 평화를 깨트린 인간의 죄를 단죄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지. 죄를 지은 인간들은 벌을 받아야 해. 왕은 철도 공사 현장과 숙소 인근에 매복해 있다가 총 든 경비병이며 관리인, 인부들을 무시무시한 송곳니로 물어 죽였어.


왕이 산포수들과 처음 마주친 곳은 운문산 학심이였어. 가난한 조선 벌목꾼들이 산판을 벌이는 산중이지. 불어오는 바람결에 묻어나는 화약 냄새로 봐서는 총 든 포수가 하나둘이 아니었어. 왕은 몇 번이나 산포수들을 덮치려고 하다가 그냥 북상을 거듭했지. 산포수들은 풍전등화에 놓인 조선 땅을 되찾기 위해 북지로 망명길에 오르는 길이더군. 왕 역시 일본군의 총구를 피해 시베리아로 가는 길이었지. 동병상련이라고 해야 하나? 남의 나라를 침탈한 침략자들의 거만한 태도는 몹시 눈꼴 시더군. 침략자들은 호랑이를 그려라 하면 고양이를 그리는 섬나라 족속들이잖아. 


인간의 두뇌로 만든 삐까번쩍한 물건은 마른하늘에 벼락같은 소리를 내지. 그 물건에 맞으면 대갈통이 날아간다는 걸 알아. 하지만 제아무리 강력한 무기인들 바윗덩어리 같은 왕을 한 방에 꺼꾸러트릴 순 없어. 잘못하다간 일격에 그 자의 목을 날릴 수 있는 가공할 저력을 지녔거든. 단도 같은 왕의 앞발톱은 상대 등짝을 깊숙이 파고들어 난도질을 낼 수 있어. 인간의 목은 사슴만큼 약하더군. 한 번 인간을 잡아먹은 경험이 있는 왕은 버릇이 돼 계속 인간을 공격하지. 그럴 땐 반드시 인간들의 추적이 있어. 그래서 우리도 함부로 덤벼들지를 않아. 자비를 베풀다가도 한 번 물면 숨이 끓어져야 놓지 그 전에는 절대 안 놓아. 숨이 끓어진 여부는 수염이 센스 역할을 해. 더구나 장난감 같은 화승총 정도론 어림도 없어. 화승총으론 30간 40간(50~70미터)이 돼야 발사하지만 왕은 50간 100간도 눈 깜빡할 사이에 달려들어 물어 뚫을 수 있어. 그래서 비호(飛虎)라 불러.
 

▲ ©문정훈 화가

 


떠도는 영혼이여

그리곤 백두산 백무수림에서 다시 만났지. 왕은 고무 발바닥 같은 발로 소리 없이 다가갔어. 처음엔 모닥불 앞에서 졸고 있는 불침번 인간을 노렸지. 성인이면 한 끼 식사로 충분하니깐. 그런데 이 인간은 불을 끼고 앉아 있었어. 난 불을 싫어해. 털이 있는 모든 짐승은 불을 싫어하거든. 머리가 영리한 인간들은 불로 짐승을 퇴치하거나 특정한 방향으로 모는 수단을 쓰더군. 불을 질러 왕을 대적하면 일단 피하고 봐. 숲속 덤불에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개털모자를 쓴 인간이 다가오더군. 절대 강자인 왕이 구태여 인간들에게 몸을 숨길 따위는 없어. 그래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어. 왕이 인간을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도망갈 기회를 주는 것이야. 왕이 푸른 안광을 발하며 경고해도 망설임 없이 계속 다가오더군. 망설임과 두려움, 그것은 인간의 본능인데 말이야. 이 친구 봐라. 간이 배 밖에 나왔군. 대략 30간, 40간 공격 거리였지. 그 정도면 단숨에 달려들어 목덜미를 부러트릴 수도 있어. 


그런데 이 친구가 대범하게 총을 머리 위로 올리더군. 총을 머리 위로 올리는 것은 복종의 태도야. 왕은 이 자가 백두산과 만주를 드나드는 큰 포수라는 걸 그때서야 알아차렸지. 상대가 상대인 만큼 큰 포수들은 영험한 산군을 함부로 잡으려 들지 않아. 산중을 돌아다니는 사냥꾼이나 심마니들이 왕을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는 것은 왕이 먼저 사람을 피하는 걸 알고 있어서야. 설사 마주쳐도 사람 쪽에서 공격하거나 도망가는 따위의 짓을 하지 않으면 모른 체해. 그러려면 보통 배포로써는 불가능하지. 


그렇다고 허락 없이 들어온 인간들을 용인한 건 아니야. 왕은 최후의 경고로 입을 크게 벌려 으르렁 마지막 경고를 보냈어. 이 미친 친구는 그래도 계속 다가오더군. 왕은 이 자를 잡을까 말까 망설였어. 그런데 코앞까지 다가온 이 친구는 대뜸 타이가의 하룻밤을 청하더군. 


“산군이시여! 청하오니 오늘 밤을 허락해주소서. 미리 알리지 못한 죄 큽니다. 내일 해 뜨면 지체없이 떠날 터이니 부디 허락해주소서.” 


그 친구 뒤에 있는 일행들 역시 일제히 머리를 조아려 경배하더군. 왕은 받아들였어. 왕은 곤란한 사람을 도와주거든. 일본 침략군에게 쫓기는 몸이니 말이야. 만약 이 친구가 우리 동료들의 가죽을 벗긴 침략군이었거나 철도를 놓는 만주족 아라사 백계였다면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우리는 그대로인데, 인간이 지나가는 데는 망가지더군. 기후위기는 인간들이 자초한 거야. 그 누구도 숲을 건드릴 순 없어. 이 땅의 주인인 왕의 허락 없이 숲을 함부로 건드리다간 피의 징벌이 내려질 뿐이야. 머리가 영리한 인간은 반드시 복수한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인간에 대한 증오가 생기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덮쳐. 특히 만물을 이롭게 하는 숲을 건드는 자라면 아주 갈기갈기 찢어 한 조각의 뼈도 남김없이 모두 먹어 치울 테야. 잊지 마. 숲에 대한 도전은 왕에 대한 도전이야. 왕의 경고야.

(2부. 조선범 망명보고서 끝)


배성동 시민기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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