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질산에 올라 송순의 ‘망선대’를 듣다

기획/특집 / 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 2021-10-20 00:00:02
태화강 100리길 탐사(1)

돋질산에 올라 시가문학의 대가 송순(宋純)의 한시 ‘망선대(望仙臺)’를 듣다

송순의 <면앙집(俛仰集)>(1829)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좌병영 남쪽 30리쯤에 대(臺)가 있어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해운대와 으뜸을 다툰다. 하루는 병사 장세호(張世豪) 공(公), 수사 봉승종(奉承宗) 공과 함께 울산 앞 바다에서 배를 타고 염포를 지나 곧바로 대 아래로 갔다. 이날은 마침 날씨가 화창해 대에 올라 구경하기가 좋았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대에 아름다운 이름이 없는 것을 흠이라 하여 내가 망선대라 이름 짓고, 절구 두 수를 지었다. 장세호 공이 이를 새겨 병영 동헌에 걸고 영세토록 전하고자 하였다.


망선대// 멀리 바다 밖에 삼산이 아득하고/ 열두 누대 아래 유람선이 매여 있네./ 머잖아 동풍이 내게로 불어오면/ 달 밝은 망선대에서 신선 맞이하겠지.//태화루 아래에서 세 사람이 손잡고/ 염포 앞바다에 한 척 배를 띄웠네./ 맑은 바람 화창한 날씨, 바다도 드넓으니/ 망선대 오른 우리를 누가 신선 아니라느냐.(번역: 송수환)”


그때 장세호와 봉승종이 각각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로 재임하고 있을 당시(중종 35년(1540) 9월~동왕 36년(1541) 10월)에 송순도 똑같은 기간에 경상도관찰사를 수행 중이었다. 남구 매암동 양죽 본동 동북쪽에 동쪽을 향해 바닷속으로 우뚝하게 뻗어 있는 산을 ‘망제산(望帝山)’, 또는 ‘범바우끝’이라고 하고, 그 정상을 망선대 위치로 추정하지만 현재 공단 건설로 지형이 사라졌다.
 

▲ 남구 매암동 양죽마을 옛터비 지명 지도(망선대 위치 망제산 인근)

 

▲ 매암동 지명 지도

 

▲ 망선대 추정지


세월 따라 사라진 ‘동천강가의 풍물들’

· 칠월칠석 전후의 모래찜질


농촌의 가장 한가한 절기인 칠석날 전후에 부녀자들만 모인 동천강가의 모래찜질은 장관을 이뤘다. 이웃 마을의 친정 식구와도 끝없는 대화를 할 수 있었고, 수제비, 밀떡, 수박, 강냉이 등을 함께 먹기도 한 여성들의 휴식 문화였으나 1950년 전후에 사라졌다. 


· 동천강둑을 걸어가는 소떼의 행진 


울산장에서 구입한 소들을 해 질 무렵에 소몰이꾼 서넛이 50~60마리를 동천강 강둑을 따라 경주와 영천으로 몰고 가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 1000가구가 이용해도 줄지 않은 산전샘


이 샘은 한 시간에 솟는 물이 80섬이고, 하루에 퍼낼 수 있는 양은 1820섬으로 1000가구가 이용해도 줄지 않았다. 6.25 전쟁 직후에 부산과 대구 등지의 유엔군에게도 공급돼 샘물을 긷는 수차(水車)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 1010년 전후 울산권의 동천강가에 주막 21곳 성업


일명 산전다리로 불렀던 병영교 입구에 있었던 교두주막(橋頭酒幕)은 경주와 강동에서 울산으로 오는 길목에 있어 손님들이 많아 인근 주민들이 잠을 설칠 정도였다.
 

▲ 태화강 하류 모래섬

▲ 돋질산, 태화강(오른쪽)과 동천강(왼쪽) 합수 지점


▲ 태화강과 동천강 합수



산 구렁이 울면 꼭 사람이 죽는 ‘돋질산’


돋질산은 저두산(猪頭山)이라고도 하는데, 마치 돼지 대가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일컫는 지명이라고 전해 온다. 주민들은 이 산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고 명산으로 인식해 예로부터 이 산의 큰 구렁이가 울면 반드시 사람이 죽었다고 전해 온다. 이 산에 삼성그룹 이병철 전 회장이 큰 별장을 짓다가 완공하지 못하고 철거한 적이 있었다. 어느 맑은 날에 이 별장 지하에 내려갔는데, 계단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단단하게 굳어 있던 콘크리트가 패여 있었다고 하는 황당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경북 경주, 안동 등으로 공급했던 소금 생산지, ‘조개섬염전’

이 염전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이 섬이 사라지기 직전인 1965년까지 많은 소금을 생산했다. 조개섬 면적의 90%인 약 4만 평에 조성됐던 염전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했는데, 광복 후에 정착민들이 인수했다. 이곳의 소금은 주로 경북 경주, 안동 등 내륙 지방으로 팔려 나갔다.

물 반 재첩 반이었던 ‘앞강’

학남마을 주민들은 마을의 앞, 즉 태화강 하류를 ‘앞강’이라 불러왔고, 재첩으로 조리한 음식을 조개수제비, 조갯국 등으로 불렀을 만큼 조개로 통칭했다. 재첩은 수온이 차지 않은 늦봄부터 늦가을까지 주로 채취했다. 대다수 주민은 소쿠리로 재첩을 잡아 메집, 국, 무침, 수제비, 칼국수 등을 요리해 먹었다. 그런데 배를 이용해서 재첩을 많이 채취해 전문적으로 판매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마을 주민들은 그 배를 ‘뻘배’라고 불렀다. 그 후 대대적인 준설 작업으로 재첩이 서식하지 않게 됐다.

두 번이나 존재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던 ‘학남나루’

학남나루는 학성동의 학남마을에 있었던 나루터다. 울산 최초의 사찬 읍지인 <학성지(鶴城誌)>(1749)에 ‘주진(注津)’은 태화나루 하류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1)에는 ‘중진(中津)’으로 다르게 기록돼 있지만 모두 이 나루를 일컫는다. 당시의 거룻배는 학남마을의 기금으로 마련해 학남마을과 중리마을 양쪽에서 자전거 바퀴에 철삿줄을 걸어 놓고 그 줄을 당겨 운행했다. 재질은 나무이며, 형태는 직사각형이고, 넓이는 소와 쟁기 등 농기구도 함께 실을 정도였다.
 

▲ 학남마을 산신제 제의 터

 

 

세웠다가 흙더미에 묻히고, 우연히 발견돼 다시 세운 ‘선입지(船入趾) 푯돌[標石]’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들은 강이나 해안가에 성을 쌓고, 본국에서의 보급이나 연락, 유사시에 퇴각을 위해 배를 댈 수 있는 항구를 가장 먼저 확보했다. 울산왜성에도 태화강과 인접한 남쪽에 ‘요(凹)’ 자(字) 형태의 선착장을 만들어 작은 배들을 늘 정박할 수 있게 했다. 이 푯돌은 원래 학성공원에서 태화강을 향해 남쪽으로 약 50m 지점에 있었다. 학성동에 토지구획정리사업을 할 때 인근 흙더미에 묻어뒀는데, 한 주민이 주택을 지을 때 우연히 발견해 현재 위치로 옮겨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주도해 세운 것으로 전해온다.
 

▲ 선입지 표석

 


신학성(神鶴城)에서 내려와 두 번 옮겼다가 철거한 ‘학남제당’

학남마을의 동제는 오랜 옛날부터 학성공원 동남쪽의 큰 바위에서 지내왔다. 동제는 당시 이 마을의 친목계였던 ‘인리계(仁里契)’에서 주관해 미리 포장과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고, 제수를 마련하는 등 모든 준비를 했다. 정화수는 처음에는 푸지새미를 이용하다가 매립된 후에는 큰새미로 바꿨다. 이 제당은 관리의 어려움으로 2019년 9월 말에 4일간 천도제를 지내고, 철거해 ‘동백 어르신 모임터’를 신축했다.
 

▲ 학남제당 터(동백어르신모임터)

 


학남마을의 수많은 사연과 함께 묻혀 버린 ‘푸지새미’,

학남마을에는 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기 전에 4곳의 우물이 있었다. 푸지새미를 비롯해 동제 때 정화수로 이용했던 큰새미와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던 아랫새미는 매립되고, 현재 약사암(藥師菴)에 절새미만 남아 있다. 푸지새미는 수량이 많아 넉넉하다고 하여 일컫는 명칭이었다. 이 우물은 이름값을 해서 인근 주민들은 식수와 빨래는 물론이고, 농업용수로도 함께 이용했다.
 

▲ 푸지새미 터

 

 

남정네들은 지고, 아낙네들은 이고, 소들은 끌고…귀하디귀한 땔감

학남마을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은 주로 동대산(東大山)에서 땔감을 장만해 남정네들은 지게 지고, 아낙네들은 머리에 이고, 소는 달구지로 끌고 왔다. 또 겨울에는 얼음판을 딛고 삼산들의 갈밭에서 갈대를 베어 중리마을에서 모은 뒤 지금의 학성교 아래로 싣고 왔다. 이곳이 곧 중진이다. 현재의 학성공원 입구에서 열렸던 나무시장에는 1950~1960년대에 특히 웅촌면 오복마을에서 소달구지로 나무를 싣고 와서 거래했는데, 외상도 가능했다. 

 

▲ 나무시장 터(학성공원 입구)

울산의 목민관 선정비 2기(基), 학성공원 북쪽 나무 그늘 속에 그들 선정 빛바래

· 부사 조재선(趙載選)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조재선은 영조 40년(1764) 7월부터 같은 왕 45년(1769) 6월까지 오랫동안 울산도호부사로 재임했다. 수천 냥의 돈으로 백성들의 노역을 보완하도록 한 일은 울산 고을을 설치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긴 재임 기간만큼이나 수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 병마절도사 이윤겸(李潤謙) 영세불망석(永世不忘石)


이윤겸은 정조 18년(1794) 6월부터 같은 왕 20년(1796) 5월까지 울산좌병사를 역임했다. 그는 임기를 마치고 6년 후 삼수군통제사로 승진했다. 이 비석에는 정조 19년(1795) 5월에 6개 면(面)의 민노(民奴) 등이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 조재선영세불망비

 

▲ 이윤겸영세불망석

장래 최초의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 선생의 울산초등학교 등하교

민속학자 송석하 선생은 1912년 언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0살이 되는 이듬해 4월에 중구 반구동으로 이사와 함께 당시 옥교동에 있었던 울산초등학교에 전학해서 1916년 3월 23일에 졸업했다. 그는 약 3년 동안 반구동 서쪽에 있었던 울산초등학교를 다녔다. 

 

▲ 태화서원

 

▲ 태화강 백리길 탐사팀


글=김진곤 울산향토사도서관 관장 / 사진=김정수 사진작가

 

※ 이 글은 울산민관협치지원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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