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 건국준비위원회 그리고 조선공산당 재건

기획/특집 / 배문석 / 2021-07-28 00:00:44
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14)

2차 세계대전이 일왕의 항복 선언으로 종결되는 날, 미군이 중심이 된 태평양 방면 연합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반명령 제1호를 발표했다. 그 핵심 내용은 한반도를 (북위) 38도를 기준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분할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한국의 경우 38선 이북에서의 일본군의 항복은 소련군이 접수하며, 이남에서는 미군이 접수한다’는 부분이다. 결국 한반도는 해방의 기쁨 아래 향후 벌어질 냉전을 잉태하고 있었다. 미·소 두 국가의 군대가 들어와 분할 점령하면서 빚어질 비극을 예측하지 못한 채 1945년 8월, 뜨거운 여름이 만세 소리로 달아올랐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여운형

조선총독부와 협상 결과를 바탕으로 여운형은 8월 16일 서울 계동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민족해방’을 선언하고 식민통치의 종말을 선언했다. 그리고 해방을 앞두고 비밀결사로 운영했던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빠르게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조직된 것을 공표했다. 이때부터 서울뿐 아니라 전국 곳곳에 건준의 지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보름 만에 145개의 건준 지방 지부가 조직됐다. 


형무소에 수감된 사상범들이 석방됐고, 치안대와 식량대책위원회도 발족했다. 해방 직후 혼란을 걱정하며 ‘일사분란의 단결’을 주문했던 건준의 메시지대로 유지됐다. 여운형은 새로운 조선을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국가’로 제시했다. 


이를 위해 좌우익을 구별하지 않고 대동단결하는 형태로 건준이 나아가길 바랐다. 그래서 건준 속에 사회주의 계열의 참여를 적극 받아들였다. 더불어 우익의 경우 부위원장으로 선임한 안재홍을 넘어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던 송진우의 참여를 적극 제안했다. 그리고 심지어 부역과 친일을 넘나들었던 김성수의 참여까지도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운형의 낙관과 달리 우익진영은 대기하면서 해방정국의 추이를 살폈다. 그중 송진우는 ‘임정봉대’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중경에서 임시정부 세력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더구나 먼저 한반도에 들어온 소련군이 38도선에서 멈추고, 그 아래 위치한 서울로 미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건준과 거리를 두는 우익인사들이 늘어갔다. 게다가 일제 패망으로 부와 권력을 뺏길까 전전긍긍하는 친일파, 부역자들은 살길을 모색하며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더듬이를 높이 세워갔다.
 

▲ 1935년,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참여한 송진우(좌)와 여운형(우)


 

경성콤그룹, 공산당 재건파로


이관술이 서울에 도착한 직후 박헌영, 이순금, 김삼룡 등 경성콤그룹 동지들 역시 되돌아왔다. 감옥에 수감됐던 동지들도 풀려나와 재회했다. 이들은 몇 년 만에 그것도 해방된 조국에서 한자리에 모인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발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무엇보다 경성콤그룹이 하나로 모이기 전에 해방 당일 이영, 정백, 이승엽, 조동호, 홍남표 등 11명이 조선공산당 결성을 선포해버렸다. 이때 모임을 ‘장안파 공산당’로 지칭하기도 하는데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그룹 중 서울파, 화요회, ML파, 상해파에 속해 활동한 이들이 모인 것이었다. 


박헌영과 이관술을 비롯한 경성콤그룹 출신들은 ‘장안파’의 공산당 결성에 대해 섣부른 결과라며 부정하고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했다. 이는 당조직을 곧바로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위’를 먼저 구성해서 사회주의운동 그룹을 최대한 결집시키는 단계를 밟는 것이었다.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가 내세운 입장은 박헌영이 8월 20일에 제출한 이른바 ‘8월 테제’,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 문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 문건은 보완을 거쳐 한 달 뒤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이름으로 새롭게 출판되기도 했다. 


내용은 모두 다섯 장으로 구성돼 있다. 1장은 ‘현 정세’로 국제정세 분석을 중심으로 해방 정국을 분석했다. 2장은 ‘조선혁명의 현 단계’에 해방조선에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노동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혁명적 민주주의 정권’이라는 것을 명확히 했다. 


“오늘날 조선은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계단을 걸어가고 있나니 민족적 완전 독립과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이 가장 중요하고 중심되는 과업으로 서 있다. 즉 다시 말하면 일본의 세력을 완전히 조선으로부터 몰아내는 동시에 모든 외래 자본에 의한 세력권 결정과 식민문화정책을 절대 반대하고 노동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혁명적 민주주의정권을 내세우는 문제와 동시에 토지문제의 해결이다.”-<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 2장 ‘조선혁명의 현 단계’ 중

조선공산당, 통일 재건되다

장안파와 재건파의 통합은 9월 8일, 서울 계동에서 열린 ‘열성자대회’를 통해 이뤄진다. 양쪽의 핵심들이 모두 모이는 대회였다. 이관술을 비롯해 재건파들은 발 빠르게 대회를 준비해갔고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작업을 치밀하게 가져갔다. 


그 중심에는 ‘8월 테제’로 밝힌 일제강점기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반성이 놓여 있었다. 장안파에 속한 이들이 모두 변절했던 것은 아니지만, 핵심들의 경우 일제강점기 말에 이르러 활동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전향서를 쓰거나 소극적 협조를 했던 이들도 있었다. 그에 반해 잇단 검거를 겪으면서 탈출과 지하활동을 펼쳤던 경성콤그룹이 중심이 된 재건파는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8월 테제’의 3장에서 장안파의 조선공산당 결성이 매우 섣부르며, 파벌주의에 빠진 행동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비판한 바 있었다.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탄압의 시기에는 기득의 영예에 만족하던 이런 자들은 합법적 운동의 시기, 즉 1945년 8월 15일에 하부조직의 창설이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여 당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기까지 하고 유해한 전통적인 파벌활동을 반복하여 인민운동의 최고지도자가 되려고 희망하였다. 그들은 흔들림 없이 오래전부터 지하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충실한 공산주의자들의 믿음직한 그룹이 있는 것을 알면서 이렇게 행동하였던 것이다.”-<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 3장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현상과 그 결점’ 중


열성대회가 시작하기 전부터 결과는 자명한 상황이었다. 명분과 사상, 두 가지 모두 재건파가 명확히 앞섰던 것이다. 그 결과 판단을 미뤘던 이들 뿐 아니라 장안파에 결합했던 이승엽, 최원택, 조동호 등이 재건파로 돌아섰다. 그리고 경성콤그룹의 주축 대부분이 재건된 조선공산당 중앙으로 진출하게 된다.
 

▲ 박헌영이 작성한 ‘8월 테제’는 이후 보완을 거쳐 9월 20일,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 이름으로 출판됐다.


 

이관술은 중앙검열위원과 재정부장으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펴낸 일간신문 <해방일보>는 1945년 9월 19일에 창간호를 내면서 “조선공산당의 통일재건 만세”란 표어를 머리에 실었다. 해방 후 한 달 동안 장안파와 재건파로 나뉘어 있던 그룹이 ‘마침내’ 하나로 통일했다는 것이다. 

 

 

▲ 1945년 9월 19일,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머리기사

당대표이자 총비서는 박헌영이고 정치국에 김일성, 이주하, 무정, 강진, 최창익, 이승엽, 권오직이 포함돼 있다. 김일성은 소련공산당, 무정은 중국공산당을 배경으로 북한으로 귀국했으나 명단에 포함돼 있다. 민족혁명당과 중국공산당에 참여했던 최창익은 아직 귀국도 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최고지도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는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대표성을 갖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정치국 왼쪽부터 이주하, 이승엽, 무정, 권오직, 최창익

 

▲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재건을 알리는 전단

 


이관술은 정치국, 서기국, 조직국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 대신 서완석, 김형선과 함께 중앙검열위원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을 맡는다. 이관술이 맡은 역할이 앞에 나서기보다 내부를 단단히 결속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관술의 동생 이순금은 조복례와 함께 중앙위원 중 여성위원으로 선출됐다. 그리고 이주하, 김태준 등과 함께 서기국에 속했다. 


이관술이 일제강점기 경성에 돌아온 뒤 이순금과 남매에서 사제로 그리고 동지로 함께했던 기나긴 시간을 거쳐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핵심이자 동지로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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