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가을 억새철의 간월재

기획/특집 / 노진경 시민 / 2021-10-18 00:00:09
행복 산행

부산에 사는 친한 부부에게 전화가 왔다. 영남알프스 9봉에 도전한다고 했다. 9개의 정상석에서 인증샷을 찍으면 은으로 된 기념주화를 울주군에게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매년 하나씩 주화를 모아 9개의 주화(매년 다른 산을 이미지로 한 주화를 받을 수 있다)를 모아볼 심산이라 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이 주화를 모으기 위해 9봉을 찾는다고 했다. 이미 1만 명(2021년 6월 기준)이 넘는 사람이 주화를 받았다 한다.

 

▲ 간월재휴게소 앞 라면을 사기 위한 줄

 

▲ 간월재

대체연휴로 삼일 연달아 쉬는 일요일에 간월산과 신불산을 향하기로 했다. 들머리는 등억의 복합웰컴센터로 잡았다. 등억으로 가는 길, 산우에게 전화가 왔다. 주차할 자리가 없다고 했다. 아래쪽 주차장에 주차해야 할 것 같다는 정보를 전해줬다. ‘그 큰 주차장에 자리가 없다니.’ 벌써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클라이밍장 앞에서 만나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수십 명의 사람이 줄지어 산으로 들었다. 좀 한적해지면 출발할까 싶었다. 허나 바라는 만큼 쉽사리 변화할 것 같지 않았다. 우리도 그 대열에 끼어 산을 올랐다. 마스크를 끼고 걷는 걸음에 숨이 턱턱 막혔다. 가을 막바지 한낮의 더위가 한참이었다. 등과 배낭 사이에 땀이 축축하다. 그래도 걷다 걸음을 멈추면 바람의 기운이 차다. 그늘에 서서 쨍한 하늘을 바라보며 가을을 온몸으로 느낀다. 하늘이 파랗다 못해 퍼렇다. 

 

 

▲ 간월산 방향으로 오르다가 돌아본 간월재의 모습

 

▲ 간월산 정상석 인증샷을 찍어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

절터꾸미를 지나 임도로 접하는 길, 적절한 장소에 행상이 아이스크림을 판매하고 있다. 사람들이 임도의 나무 그늘 아래 줄지어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없었던 아이스크림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 셋 다 현금이 없다는 것을 대화로 확인한 순간, 옆의 산객이 “계좌이체 되던데요.” 하신다.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산길에서도 계좌이체로 아이스크림을 구매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놀라움을 공유한다.

 

▲ 간월산 정상의 한적한 바위에서 바라보던 산그리메

 

▲ 억새와 산하의 이이벌

다시 걷는다. 길 위에는 사람들이 계속 오르고 내린다. 오늘 간월재로 향하는 길엔 몇이나 같은 길을 걸어간 것일까 생각해 본다. 이 흙길이 얼마나 단단해졌을까도 생각해 본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생각에 빠져 길이 변화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금세 간월재에 도착했다. 조그맣게 생긴 그늘이 있는 곳마다 사람들이 즐비한 것에 경악했다. 다들 다닥다닥 앉아 점심을 먹고 있다. 이곳이 야외이긴 하지만 코로나 따위는 모두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더 올라 간월재휴게소 앞에 도착하니 매점을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줄이 돌탑까지 이어져 있다. 라면을 들고 지나가는 누군가가 30분 넘게 기다렸다는 말을 지인에게 하는 것을 듣는다. 

 

▲ 신불산 쪽에서 바라본 간월재와 간월산

 

▲ 볕을 받아 반짝이는 억새 파도

우리 일행은 스르륵 그 공간을 빠져나와 간월산으로 향한다. 간월산으로 오르는 길에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내려온다. 그래도 간월재보다는 사람이 적다. 허나 한적하다는 단어나 한산하다는 단어는 사용할 수가 없다. 간월산을 오르다 조망이 없이 꽉 막혔지만 그래서 사람이 없는 어느 한적한 장소에 우리도 앉았다. 가져온 빵과 김밥을 꺼내 늦은 점심으로 먹는다. 오늘의 가을 날씨와 경치에 대해 감탄했다. 이 좋은 걸 많은 사람이 만끽할 수 있어서 좋지만 서로에게 고역인 것 같다는 말을 꺼냈다.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라는 시의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 바람에 파도치는 억새 물결

 

▲ 간월재 억새

오늘의 산행을 마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멀리서 온 산우의 도전에 앞가림이 되고 싶지 않아 그 말을 꾸욱 삼킨다. 간월산 정상에 도착하니 역시나 정상석 앞에 사람들의 줄이 길다. 산벗들은 기념주화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투자해 인증샷을 찍으러 나섰다. 사람들이 적은 한적한 바위 위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멀리 산그리메 그 너머를 바라봤다. 

저 멀리 지리산이 어딘가 있겠지. ‘가을철의 산들은 고역을 겪고 있겠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경치를 바라보니 생각들은 점점 사라지고 그저 우두커니 자연의 일부가 됐다. 쨍한 볕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배낭 속의 차가운 커피가 생각난다. 


커피를 홀짝이며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정상석을 바라본다. 이 좋은 경치와 날씨를 두고 저기 줄 서서 이 순간을 담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쓰는 것이 안타깝다. ‘기념주화를 받는 순간은 기뻐도 어딘가 처박아두면 기억도 안 날 터인데’라고 생각해 본다. 이 한적한 바위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것에 약간의 우월감도 느껴진다. 한동안 주말 산행은 피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북적임에 보탬이 되지 말아야지.


노진경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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