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과 손응교의 오래되고 깊은 인연…손응교가 기억해 준 이관술

기획/특집 / 배문석 / 2021-10-20 00:00:42
기획

일제강점기 후반부를 뒤흔든 항일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22)

1946년 1월, 이관술이 심산 김창숙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무거운 마음만 가득했다. 이관술은 동덕여고보에서 교사로 독립운동에 나섰던 때부터 항일혁명운동의 전선에서 함께 한 민족주의계열을 존중해왔다. 해방 후 현대일보에 기고했던 회상기에서 동덕여고보 시절을 회고할 때도 동료 교사 신명균을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로 높게 평가했던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해방공간에서 독립운동가 중 원로로 꼽히는 김창숙이 ‘신탁통치’ 찬반 문제로 조선공산당에 면담을 요청하자 당을 대표해 방문한 것 또한 여러 인연과 함께 존중의 뜻이 더해진 셈이다. 하지만 만남은 헝클어졌다. 김창숙 자서전에는 이날 이관술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일어나 떠났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관술과 김창숙 두 사람의 뜻이 충돌한 순간 누구보다 마음 졸인 이가 있었다. 바로 김창숙의 둘째 며느리였던 손응교(1917~2016)였다.
 

▲ 왼쪽부터 심산 김창숙, 며느리 손응교, 둘째 아들 김찬기(1915~1945)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손응교


손응교는 원래 경주 출신으로 아홉 살 되던 1925년, 가족 모두와 함께 울산 범서 입암마을로 이사 왔다. 그녀의 집안도 여러 명이 독립운동 국가유공자로 추서됐다. 증조부 손최수(1851~1918)는 을미년(1895)에 경주에서 의병을 이끌었고, 조부 손진인(1869~1935)은 1926년 ‘2차 유림단 사건’ 때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종조부 손진형(1871~1919)도 의병활동과 교육운동을 했고 상해임시정부 초기부터 투신했다. 그리고 고모부 정수기(1896~1936)와 숙부 손학익(1908~1983)도 국가유공자다. 


아버지 손후익(1888~1953)은 유림 한주학파 중 뛰어난 유학자였으며 김창숙과는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그리고 사돈의 관계뿐 아니라 평생을 김창숙과 같은 입장을 견지했다. 그래서 김창숙이 주도했던 유림의 독립운동인 1차, 2차 유림단 사건에 모두 동참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귀환한 임시정부와 뜻을 같이했다. 


손후익이 경주 오금마을에서 울산으로 온 것은 같은 한주학파인 가산 이우락(1881~1951)이 입암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우락은 손후익 집안이 살 곳을 마련하고 생활을 적극 도왔다. 손후익은 타향인 입암마을이 마음에 들었고 자신의 호를 문수산과 선바위(입암)를 뜻하는 문암(文巖)으로 정했다. 그런데 이사한 지 얼마 안 돼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북경에 머물던 김창숙이 만주에서 무장독립군을 양성하는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것이다. 김창숙은 이희영, 신채호 등과 뜻을 모아 북만주 일대에 독립운동 기지와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국내 유림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는 계획을 세운 뒤 1925년 8월 하얼빈과 신의주를 거쳐 들어왔다. 일경이 이름 붙인 2차 ‘유림단 사건’의 시작이다.
 

▲ 손응교 가계도 <울산여성의 독립운동> 157p, 울산여성가족개발원, 2020

손응교가 김창숙을 처음 만난 1926년 2월

손후익은 같은 해 10월 서울 동대문 밖 영도사에서 처남 정수기와 함께 자금 모집을 위한 회합에 참가했다. 각 지역 유림을 나눠 모금 담당 구역을 정할 때 손후익은 경주와 울산을 맡았다. 하지만 모금이 여의치 않았다. 1919년 파리에 독립의 뜻을 밝힌 장문의 편지를 보낼 때 참여했던 유림 인사 중 다수가 몸을 사렸기 때문이다. 자금 모집의 결실이 적자 김창숙은 지방 순회에 직접 나섰다. 


그런데 1926년 2월 초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양산 물금역에 도착한 후 승합버스를 타고 울산으로 향하던 때 언양천을 지나던 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했다. 여러 명이 크게 다쳤는데 김창숙도 허리를 다쳐 몸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그 소식을 듣고 손진수·후익 부자가 수십 리 밖까지 마중 나가 입암으로 업어서 데려왔고, 김창숙은 수십 일 동안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요양했다. 


당시 열 살이 된 손응교는 사랑방에 머물며 거동을 못 하는 어른이 있다고 해 궁금함을 못 이기고 몰래 엿보았다. 그런데 몸을 가누지 못하고 병간호를 받는다는 어른이 앉아서 편지를 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게 장래 시아버지가 되는 김창숙과 첫 만남이었다. 


몸을 조금이나마 회복한 김창숙은 3월 4일 웅촌 석계에 사는 사돈 이재락의 집(현 근재공 고택)으로 옮겨 행랑채에 은신하다 조심스럽게 딸 덕기와 눈물의 상봉이 이뤄졌다. 그 뒤 김창숙은 동래 범어사로 은신처를 옮겼고 3월 15일 동지들과 회합한 뒤 4월 일제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중국으로 되돌아갔다. 


김창숙이 돌아간 직후 일제 경찰의 검거가 시작됐다. 일경은 특별조사반을 구성해 수사했고 전국에서 약 50명을 체포했는데 손진수, 손후익, 이우락, 이재락이 모두 체포됐다.
 

▲ 1927년 2월 13일 <동아일보> 유림단 공판 화보, 앞 왼쪽부터 이우락, 이종흠, 손후익

이관술은 손응교 집안을 옹호하고 적극 지원

유림단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이관술이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방학을 맞아 고향에 돌아와 보니 마을 전체가 유림단 검거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김창숙과 연관돼 손응교의 집에서 두 명이나 체포되자 마을 사람들 인심이 흉흉해졌다. 그런데 이관술이 적극 변호하고 나섰다. 


손응교가 자필로 쓴 회고록을 보면 “우리 집을 무슨 범죄의 온상처럼 보는 사람이 얄밉기만 했는데 이관술 씨가 우리 집은 훌륭한 가문이고 우국지사의 집이라고 칭찬해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적고 있다. 이관술은 움츠려 있는 손응교 형제들을 위로했고, 범서보통학교 입학까지 소개해줬다. 손응교는 그 전까지 일본식 교육을 받으면 안 된다는 집안 어른들 입장 때문에 처음 학교에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 색다른 경험은 조부 손진수가 출소하면서 다시 끝나게 된다. 


이관술이 이듬해 방학 때 돌아오자 손응교는 마을 아이들과 함께 배움을 청했다. 손응교의 회고록에서 이관술을 통해 “신학문도 배우고 독립사상도 지도해주기에 무척 따랐고 잡지 개벽, 시집, 소설 등을 탐독하며 이상과 꿈을 키워 왔다”고 기억했다.


이관술이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동덕여고보 교사로 일할 때 경성에 있는 여학교에서 배우는 신학문을 동경하는 손응교를 고향에서 데려가 청강을 시켰다. 손응교의 딸인 김주는 어머니가 그때를 회상하며 했던 말을 전해줬다. “이관술 선생이 어머니에게 ‘일을 쳐야 한다’고 말해줬다고 해. 어머니가 용기를 내 가출하듯 집에 말을 않고 이관술 선생을 따라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간 거야. 그러다 집안 어른이 올라와 다시 울산에 잡혀 왔는데 배움의 기회를 준 이관술 선생을 평생 고마워했어.”
 

▲ 손응교가 자필로 적은 회고록(소장: 손응교 딸 김주)

 


결혼 후 대구에서 살림하다 거지 차림의 이관술 재회

손응교는 열일곱 살 되던 1933년에 결혼했다. 어린 시절 사랑에서 요양했던 어른, 김창숙의 둘째 아들 김찬기였다. 이모부 정수기가 중매를 섰지만 부부가 될 이들의 대면도, 집안 간 상견례도 없이 이뤄진 결혼이었다. 


손응교는 시집 간 지 한 달 반 정도 돼서 남편과 함께 대전형무소로 시아버지 김창숙을 면회 갔다. 김창숙은 유림단 사건 등으로 체포된 뒤 14년 형을 받아 수감 중이었다. 면회에서 인사하려고 보니 김창숙의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손응교는 심한 고문으로 다리 불구가 된 김창숙이 ‘옷은 흰옷을 입고 발은 맨발이고 간수한테 업혀서’ 나왔다고 기억한다. 김창숙은 그 뒤 1934년 12월에 복역 기간을 4년 반 정도 남겨두고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김창숙뿐 아니라 남편 김찬기도 세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찬기는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때는 진주고보에서 불온문서를 제작해 뿌리다 체포당했다. 두 번째 옥고는 결혼 후 1년 뒤 1934년(21세) 11월 5일로 러시아혁명 기념일을 앞두고 대구에 불온문서를 살포한 혐의였다. 같은 해 12월 6일 김찬기가 석방되자 손후익은 사위를 울산 성안동의 백양사에서 요양하도록 소개했다. 


백양사와의 인연은 1936년 3월 김창숙이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해 요양하기 위해서 백양사를 방문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때는 무려 4년이나 머물렀는데 역시 손후익이 적극 권했다고 한다. 김창숙은 백양사에서 한시를 100여 편 남길 정도로 몸도 추스르고 마음의 위안도 얻었다. 남편과 시아버지를 따라 백양사에 오면서 손응교는 어린 시절을 보낸 울산과 대구를 오가며 머물렀다.


그런데 그 시기 대구에서 뜻밖의 모습으로 이관술과 깜짝 상봉이 이뤄졌다고 한다. 손응교가 대구경찰서 앞을 지날 때 거지 차림으로 동냥하는 이관술을 목격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은 대화 한 마디, 아는 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눈만 마주치고 뒤돌아섰다고 한다. 이 시기는 이관술이 이재유 체포 후 전국을 돌면서 경찰 검거망을 피할 때였다. 이관술은 도피하면서도 각 지역 조직을 만들고 지도했는데 대구에서도 꽤 오래 머물렀다. 경찰서 앞에서 변장한 것은 일경의 동태를 살피는 방법으로, 이관술은 1940년에도 구두닦이로 변장해 서대문서 앞을 정찰한 바 있다. 

 

▲ 10월 11일, 아버지 김찬기와 할아버지 김창숙이 병 요양했던 백양사를 찾은 후손 김주, 김태욱. 이관술의 외손녀 손옥희. 김창숙기념사업회 홍윤정 학예실장이 동행했다.

 


이관술의 비극적 최후를 유족들에게 알려준 손응교

손응교와 이관술의 인연은 2005년 이관술의 후손들에게 이어졌다. 이관술의 딸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것은 알아도 정확한 과정과 날짜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제사도 생일에 맞춰 지냈는데 그 날짜를 바로 잡아준 것이 손응교였다. 


손응교는 2005년 성주 김씨 고택으로 찾아온 이관술의 딸과 외손녀를 만나 오랫동안 혼자만 알고 숨겨온 이야기를 꺼냈다. 1950년 7월 3일,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인 이관술을 후퇴하던 국군이 처형한 사실 말이다. 


손응교가 정확히 어떤 경위로 알았는지 모른다. 사회원로였던 김창숙을 통했거나 본인이 수소문했을 수도 있다. 다만 손응교의 기억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 조사(2006년 접수)를 거쳐 사실이라고 밝혀졌고 2010년 보고서 5권에 실리게 된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는 손응교의 기억은 정확했다. 그리고 이제 인연은 손응교의 딸 김주와 이관술의 외손녀 손옥희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해 방영한 MBC <다큐프라임-이관술> 에 손응교의 딸이 인터뷰하며 어머니가 쓴 회고록을 전달했다. 8월 말에 이관술의 외손녀와 만남이 이뤄지고, 지난 10월 11일에는 울산으로 손응교의 후손들을 초청했다. 만 하루를 꼬박 동행하며 손응교가 이관술에게 수영을 배운 곳으로 짐작되는 천전리각석 앞, 입암마을, 근재공 고택, 백양사를 돌아봤다. 그렇게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고리가 생긴 것이다.

 

▲ <진실과화해를위한과거사위원회 2010년 보고서> 5권, 손응교가 알려준 이관술 처형일

 

▲ 입암마을 손응교가 살던 집을 찾은 후손들(왼쪽), 새롭게 인연을 맺은 두 후손(오른쪽)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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